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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루님의 서재
80년대의 빚이 없다는 작가, 귀걸이를 하고서 문단의 선 작가. 이래저래 친구로부터 주워들은 김영하에 대한 인상은 이상형이었다.

'담배같은 소설을 쓰고 싶었다.'
작가 후기에 밝힌 김영하의 소설론은 그 자체로 문학이다. '유독하고 매캐한, 조금은 중독성이 있는, 읽는자들의 기관지로 빨려들어가 그들의 기도와 폐와 뇌에 들러붙어 기억력을 감퇴시키고 호흡을 곤란하게 하며 다소는 몽롱하게 만든 후 탈색된 채로 뱉어져 (여기가 포인트!) 주위에 피해를 끼치는 그런 소설을...'

이러한 작가에게 담배를 회피하는 인물은 어떻게 보일까? 소설집의 메인제목이 된 단편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는 머피의 법칙으로 틈틈히 짜여진 하루를 보내는 주인공 '나'를 보여준다. 아침부터 질레트 면도기가 부러져 면도는 반절만 했고, 지각이 두려워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를 모른채 지나갔고, 핸드폰이 없어 버스정류장 앞 구조 요청을 하려 공중전화로 달려갔으나 고장났고, 지갑 없이 버스엔 올라탔고, 요금 문제로 기사와 실랑이를 벌이던 중 교통사고가 나 양복은 구겨질대로 구겨지고, 갈아 탄 버스 안에선 성추행범으로 의심받고, 이제 지각으로 인한 직장상사의 압박이 버티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회사에 도착한 '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던 도중 고장나 갇히게 된다. 경리부의 한 여직원과 함께. 이때 담배 한대를 피려는 '나' '담배 피워도 됩니까' 여자에게 양해를 구한다. 여자는 거절한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간접흡연의 폐해에 대해 총론, 각론, 개론을 거쳐 1200자 논술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이 부분에서 난 화가났다.

미스터리 치정극 '사진관 살인사건', 작가인 남편을 흡혈귀로 의심하는 겹 액자소설 '흡혈귀', 불법 CD 유통업 종사자와 유부녀의 짧은 사랑 '바람이 분다', 욕으로 시작해 섹스로 점철되고, 빽차로 끝나는 '비상구'. 대부분이 좋았다. 단편의 묘미는 역시 쏠쏠해 책을 더디 읽는 나조차 하루만의 모두 읽었다.

그럼에도 가장 큰 재미는 '고압선'이었다. 대학시절 '가슴 큰' 친구 B의 여자를 흠모했던 주인공이 이혼한 '가슴 큰' 그녀와 재회해 사랑을 나누다 투명인간이 되는 작품. 그야말로 판타지다. 마이 판타지 스토리.

맘에 와닿는 몇몇 구절 중 하나를 선별했다.

'여자들은 한번쯤은 바라는 것일까. 어떤 남자가 자기를 위해 남편을 죽여주기를, 목숨을 걸어주기를. 아서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일어난다 해도 그건 추문이다. 그 흔하디흔한 치정살인.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하는 추잡한 거래로 환원될 뿐이다.
인간의 삶이란 그렇게 드라마틱하게 설계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 단편 '사진관 살인사건'中

빠른 필치로 속도감 있게 소설을 전개해나가는 작가의 능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티비도 인터넷도 영화도 재미없어진 20대에게 이 소설을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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