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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루님의 서재
밀란 쿤데라의 책을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그러니까 독서에 집착했던 때다. 무언가에 대한 집착은 언제나 괴로움을 낳곤 하는데 그 좋다는 책도 예외는 아니었다. 독서를 즐기거나 흥미롭게 여기기보단 책을 구입하고, 글자를 보았다는 것에 더욱 무게를 두곤 했다. 문맥을 읽기보단 글자를 보았던 데는 스스로에게 버거운 책을 골랐다는 점과 정해진 시간 안에 책을 읽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크게 작용했다. 어찌나 책을 열심히 보았던 지 수업시간이나 자율학습시간에 고감자에게 들켜 혼나곤 했다. 한편으론 고감자에게 책을 가까이 하는 학생으로 각인되는 뜻하지 않은 수확도 있었다.

이러한 독서벽의 와중에, 신문의 게재된 베스트셀러 목록은 먹잇감을 선택하는 데 참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먹잇감을 고를만한 눈을 지니지 못했던 내게 베스트셀러 목록은 최선은 아닐지라도 최악으로 향하진 않을 나침반 역할을 해준 셈이다. 물론 베스트셀러가 베스트북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정주영 일대기 '이땅에 태어나서'를 구입했던 일은 참으로 안타깝다. 현대그룹에 가면 공짜로 나눠줬을 법한 책이니 말이다. 그래도 정주영씨 참 열심히 살았더라.

한번은 밀란쿤데라의 '정체성'이 베스트 셀러 6위에 올랐던 적이 있다. 밀란쿤데라와 내가 접속하는 순간이다. 서점에서 발견한 '정체성'은 문고판 크기의 얇은 양장본의 모습을 하고서 내게 허영의 세계로 손짓했다. 백발을 한 서구의 한 작가가 쓴, 이 책을 난 읽을 수 없었다. 첫장부터 마지막장까지 그림책을 보듯 글자를 마구 본 후에야 겨우 책을 덮었을 뿐이다. 그래도 그 뿌듯함은 실로 괜찮았다.

1년쯤 지나, 집안 책꽂이에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꽂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제목부터 지적허영을 피울 소지가 다분했던 쿤데라의 책장을 다시금 넘기게 된다. '정체성'을 봤던 시기로부터 정신적 성장은 제로에 가까웠기에 나의 뇌세포는 이번 책 역시 그림 동화책 이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쿤데라의 소설을 처음 접한 98년 이래 3년이 지난 2001년에서야 비로소 쿤데라의소설을 읽게 되었다. 책을 보던 그때, 그리고 읽는 지금. 둘 사이에 차이점을 보면 쿤데라의 소설을 재밌게 읽는 팁이 드러난다.

우선 무거운 주제를 한없이 가벼운 깃털로 만들어버리는 허무주의에 대한 인식이 전무했다. 목적지를 향해 내달리는 기관차처럼 고등학생, 그의 목표는 오직 대학뿐이다. 일정한 철로를 벗어난 삶은 낙오자란 이름으로만 기억했다. 국가, 어른, 학교, 사랑, 우정 등 세상 모든 것에 '진지함 이상의 비장함으로 임해야 한다'는 생각의 틀로는 쿤데라 소설의 위트를 받아들일 수 없기 떄문이다.

둘째 68혁명의 기운으로 가득한 서구의 틈바구니 속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체코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당시 유럽은 모든 권위에 대한 도전을 기치로 한 문화혁명의 시기였다. 유럽전반에 퍼진 '일상 속의 혁명'의 기운이 체코에도 전해졌지만 '프라하의 봄'은 오래가지 못한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실현코자 했던 체코정부를 소련이 좌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셋째, 다소 지엽적이지만 새로운 소설형식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단일 시점의 소설만 접해온 내게 쿤데라 소설의 변화무쌍한 시점은 벅차게 다가왔다.

이제는 미디어에 의존하지 않고 내게 맞는 책을 서점에서 직접 고를 수 있다. 세월의 흐름때문인지, 국문과 서당개로 3년을 보내서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장차 도서관을 만들 생각인지, 구입한 책을 책꽂이로 보내면 끝이다. 글자에 집착했던 어리석은 그때가
되려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집착은 괴로움을 남기지만, 지금과 다른 나 또한 남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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