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12월 3일 자정이 되어갈 무렵, 서울에 사는 아들한테서 전화를 받았다. 비상계엄이라고 어떻게 해야 하냐고. 당장 욕부터 튀어나왔다. 양산에 사는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폭풍 검색만 했다. 누군가 올린 글에서 이건 불법적인 것이며 계엄 해제가 가능하다고 하는 것을 읽고 조금 안심이 되었다. 아들은 헬기 소리가 들린다며 내일 출근할 수 있을지 걱정했다. 아들의 근무지는 여의도였다. 자고 일어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윤석열을 당장 탄핵시켜야 한다고 아들과 통화를 마쳤으나 국회로 가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내란 세력을 처벌하지 못한 채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1년 간 그 밤에 벌어졌던 일들을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알게 되긴 했으나 현장에 있지 않았던 나는 그저 영화 관객, 역사책을 읽는 독자가 된 기분이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국민들이 직접 지켜내었다며 칭찬하는 외신들의 보도를 보면서도 남의 나라에서 벌어진 일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계엄의 밤, 국회의사당에서 분투한 123인의 증언을 담은 <12.3 그날 그곳에 있었습니다>를 읽었다. 현장에 있었던 123명의 인터뷰를 읽으며 또다시 부끄러움이 몰려왔고 이원종 배우의 심정에 백번 천번 공감했다.
아내의 만류가 있었지만 현장에 가서 어떤 행동을 한다면 자신의 배우 생활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웠다고 말했다. 가족 몰래 국회의사당 근처에 갔지만 주위만 맴돌다가 다음 날 새벽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브레히트의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읽으며 ‘살아남아서 슬프고 창피하고 면목이 안서는 삶을 계속 살아가게 되는 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탄핵 촉구 집회에 나가 공개적으로 발언을 했고 이재명 후보 지지 유세를 했다.
이번 인터뷰를 수락한 이유도 그 때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언젠가 적극 가담자로 잘못 알려지는 것은 막고 싶었다고 한다. 이원종 배우는 123명의 증인 중에 그날 현장 가까이 가지 못했고 적극적인 행동을 하지 않은 한 사람이었다.
국뽕 아니고 이젠 자부심을 느껴도 된다고 하면서 자주 듣는 말이 있다. 대한민국은 나라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국민이 일어선다고. 이번에는 반짝이는 응원봉을 들고 민주주의를 지켜냈다고. 정말이지 맞는 말이다. 내란을 일으키려했던 세력을 막아낸 스스로를 이젠 자랑스러워해도 된다. 그런데 전국민이 똑같은 생각으로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서부지법 폭동 사건도 그렇고 윤석열을 지지하는 사람들(교묘하게 힘을 발휘하는 법관들 포함)을 보면 말이다. 일제 강점기 때 목숨과 재산을 바쳐 독립 운동을 했던 분들이 있었지만 그분들을 쫓고 잡아 가두고 고문하던 악랄한 조선인 순사들도 있었다. 물론 나라를 팔아먹은 이들도 있었다. 독립 운동한다고 나라를 되찾을 것 같냐고 자조하며 체념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분은 홍원기(63세)씨다. 그날 밤 그는 나이트 근무였다. 교대를 위해 회사에 출근하면서 계엄 소식을 들었다. 일단 근무복을 갈아입고 동료들에게 계엄이 떨어졌다고 했더니 ‘그게 선배님과 무슨 상관이냐’는 말을 들었다. 다른 동료에게 근무를 바꿔달라고 부탁하니 이유를 물어봤다. 계엄이 떨어져서 가봐야겠다고 답했다. 그 동료 역시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했다. 그는 ‘나하고는 상관이 있다’라고 대답한 뒤 회사를 나와 엄청난 속도로 차를 몰았다. 충남 당진에서 여의도까지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 국회의사당에 있었는데 3일 째 되는 날 회사에서 연락이 와서 월차 연차를 다 소진하겠다고 했고, 열흘 후 다시 전화가 와서 연차 소진되는 날까지 처리해주면 퇴사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남태령에도 있었고 한강진에도 있었고 광화문에도 있었다. 12월 22일에야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청소년 단체를 40년간 운영하다가 뒤늦게 생산직 일을 시작해서 만족하며 회사를 다녔지만 계엄의 밤 이후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2025년 4월 1일부터 새 직장에 다니고 있다.
취재진은 그에게 질문했다.
“다음에도 똑같이 행동할 건가요?”
“예. 그거는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아마 그런 일이 벌어지면 나는 똑같은 행동을 하겠죠. 후회 같은 감정은, 뭐 잠시는 들긴 하죠. 춥고 화가 나고 힘들 때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도 잠시죠. 한 번도 제 인생을 후회해본 적이 없습니다.”
한 개인의 행동이 무슨 변화를 일으킬 수 있냐고들 하지만 그날 국회의사당에 모인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계엄 해제는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는 유신이나 5.18 같은 일이 벌어지는 걸 지켜볼 수 없다고 생각한 개인들의 행동이 낳은 결과는 위대했다. 전쟁 때, 나라의 주권을 빼앗겼을 때 민초들이 일어났듯 위정자들의 잘못을 바로잡은 것은 일반 시민들이었다.
2024년 12월 3일 밤,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럽고 고맙다. 나처럼 행동하지 않아 그들에게 빚졌다고 생각한다면 <12.3 그날 그곳에 있었습니다>를 읽길 바란다. 그날의 생생한 기록을 만나 우리의 목소리를 내야할 일이 생긴다면(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하겠지만) 분연히 일어날 기백의 씨앗을 품게 될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도록 알리는 것뿐이라 또 부끄럽다.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