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설집을 읽을 때는 차례 순서대로 읽는다. 그런데 처음 만난 작가이고, 도대체 제목과 같은 제목을 단 마지막 장은 어떤 내용일지 궁금했다. 「그런데 블랙홀」을 읽은 뒤 맨 뒤의 「미확인 홀」을 조금 읽었다. 그리고 후회했다. 처음에 실린 작품의 외전 느낌이 나서, 스포일러를 읽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책을 살펴보니 이 책은 장편소설이었다. 혹시 이 리뷰를 책을 읽기 전에 접했다면 순서대로 읽는 것을 추천한다. 많은 인물과 장소를 설정하고 서사를 만들며 얼마나 세세한 설정을 하였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만큼 촘촘하게 짜인 소설이었다. 읽다 보면 여덟 편의 소설이 꼭 희곡의 '장'처럼 느껴져서 연극으로 구성된다면 어떤 느낌일까? 혼자 상상해보기도 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술술 읽히는 장편소설을 읽게 되어 좋았다.
『미확인 홀』은 희영이 블랙홀을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지 고민이 되었지만, 가장 최초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그렇다. 그 이후부터 희영, 필희, 은정, 필성, 찬영, 순옥, 미정, 혜윤 등 인물의 마음에 하나씩 있는 정체 모를 미확인 홀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고 켜켜이 쌓인다. 소설 속 인물이 아닌 우리의 마음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구멍은 하나씩 있기 마련이다. 그만큼 다양한 독자가 읽어보면 좋겠다. 책을 관통하는 이미지가 표지와 도비라에도 잘 반영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은 「도장」이었다. 미정이 느낀 허탈감, 자신의 쓸모에 대한 고민 등은 언젠가 나도 느껴본 것이었다. 미정에 비할 수야 있겠냐마는, 지금까지 산 시간 동안 어렴풋이 느껴본 감정이었고, 꽤 진지하게 해본 고민이라서 공감할 수 있었다. 미정을 귀찮게 하는 주변인들을 보며 나도 덩달아 짜증을 냈는데, 조금 더 살아볼까? 마음을 먹은 미정을 보고는 나도 스르륵 녹았다. 왠지 반성도 하게 되었다. 나도 엄마 생각이 났나 보다. 엄마는 정말 다 계획이 있나.
마음이 허전한 사람, 그 허전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다독이거나 채우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한겨레출판 서평단 하니포터6기)
물건에 깃든 추억 때문에 버리지 못하고 이고 지며 살았는데,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다 보니 모든 추억이 하찮게 느껴졌다. 이것도 버리고 저것도 버리자. 엄마 것도 버리고 내 것도 버리자. 그렇게 미련 없이 버리다 보니 베란다 방이 볼펜 한 자루 없이 텅 비었다. - P51
연이은 부닥침으로 추락의 속도가 더뎌졌고, 미정은 그 모든 게 엄마가 마련해놓고 간 장치임을 깨달았다. (···)
미정은 허리 높이만큼 쌓인 쓰레기봉투 더미에서 어제 자신이 내다놓은 봉투를 찾았다. 익숙한 구두와 정장, 컵라면 용기와 축축한 휴지, 액자와 수첩 같은 것이 뒤섞여 있는 봉투 안에서 금빛 손톱깎이를 건져올렸다. 집에 하나밖에 없는 손톱깎이였다. 미정은 점퍼 주머니에 손톱깎이를 넣고 봉투를 다시 묶었다.- P78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것이 아닌 건 결국 잃게 마련이라고 생각하며 순옥은 살아왔다. 버리거나 버려지는 것 모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다르게 생각해보기로 했다. 살다 보면 모든 걸 한순간에 잃는 것 같아도, 살아보면 어떤 걸 완전히 잃기까지는 여러 단계가 존재한다고. 그러므로 완전히 잃지는 않을 기회 또한 여러 번 있다고. 때로는 잃지 않겠다는 의지가 상실을 막아주기도 한다.- P113
직원은 돈을 사양했다. 뜻밖의 호의에 놀란 혜윤이 직원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서러움을 많이 삼켜본 눈이었다. 하지만 남의 서러움까지 받아줄 여유는 없는 눈. 그래서 조금 미안해하는 눈.- P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