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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찌모찌의 맛있는 책 읽기
  • 먼저 온 미래
  • 장강명
  • 18,000원 (10%1,000)
  • 2025-06-26
  • : 50,464


2016년 봄이었습니다. 이세돌 9단이 알파고와 마주 앉았던 그날, 전 세계는 숨을 죽이고 바둑판을 바라보았습니다. 인간 최고의 기사가 다섯 번의 대국 중 단 한 번만 승리했을 때, 우리는 그것이 오래도록 다시 보기 어려운 장면이 될 줄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장강명의 『먼저 온 미래』는 바로 그 충격 이후의 시간을 집요하게 따라가는 책입니다. 이 책은 AI가 얼마나 뛰어난 기술인지를 설명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오히려 압도적인 기술 앞에서 인간의 자부심과 권위와 존재감이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차갑고도 선명하게 기록합니다.


책을 읽으며 가장 쓸쓸하게 다가온 장면은 바둑 해설자의 자리였습니다. 한때 해설자는 오랜 경험과 직관으로 수의 의미를 풀어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많은 사람은 해설자의 판단보다 화면 한쪽에 뜨는 AI 추천 수와 승률 그래프를 먼저 신뢰합니다.


수십 년 동안 쌓아 올린 베테랑의 감각이 기계의 수치 앞에서 너무 쉽게 밀려나는 모습은 묘한 감정을 남깁니다. 알파고 이후 프로기사들의 일자리가 곧바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평생 바쳐 온 실력의 가치와 직업적 긍지, 바둑을 향한 대중의 존중은 이전과 같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이 책이 붙드는 핵심은 생계의 문제가 아니라 의미의 문제에 가깝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잘하는 일을 통해 스스로를 이해하고, 그 일을 통해 세상 안에서 자기 자리를 확인합니다. 그런데 AI가 그 능력을 압도적으로 넘어서는 순간, 사람은 내가 왜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지부터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AI는 그저 인간을 돕는 도구일 뿐”이라는 말이 이제 조금 불안하게 들립니다. 물론 기술은 도구일 수 있지만, 강력한 도구는 어느 순간 우리의 생활 방식과 판단 기준을 바꾸어 놓습니다. 스마트폰이 하루의 감각을 바꾸었듯, AI 역시 인간의 사고방식과 경쟁의 규칙을 새로 쓰고 있습니다.


바둑계에서도 AI를 스승 삼아 공부한 이들은 빠르게 성장하며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나는 AI를 쓰지 않겠다”는 선택은 점점 고집에 가까운 일이 되어 갔습니다. 기술은 처음에는 매력적인 선택지처럼 다가오지만, 어느 순간 거부하기 어려운 환경이 됩니다.


책에서 또 하나 마음을 무겁게 만든 것은 신뢰의 붕괴입니다. AI가 일상화된 바둑계에는 치팅에 대한 의심과 불신이 스며들었습니다. 누군가 갑자기 좋은 수를 두거나 성적이 눈에 띄게 오르면, 사람들은 노력의 결과를 인정하기 전에 기계의 도움을 의심하게 됩니다.


기술은 인간의 한계를 넓혀 주었지만, 동시에 인간과 인간 사이의 신뢰를 약하게 만들었습니다. 서로의 실력을 존중하던 세계에 감시와 의심의 공기가 들어온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책은 바둑계를 넘어, 우리가 앞으로 마주할 사회의 차가운 단면을 드러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저자는 기술이 가치를 앞질러 가는 현실을 경계합니다. 무엇을 더 만들 수 있는가보다 그것이 인간에게 정말 필요한가를 먼저 살펴야 하고, 무엇이 더 효율적인가보다 그것이 인간의 존엄과 삶의 의미를 지켜 주는가를 먼저 헤아려야 합니다.


『먼저 온 미래』는 바둑 기사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둑계가 AI 이후의 세계를 조금 먼저 겪었을 뿐, 우리는 이미 그 뒤를 따라 걷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일은 먼 미래를 상상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 곁에 시작된 변화를 똑바로 바라보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너무 빨리 변해 버린 세계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든 적응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적응이 빠를수록, 무엇을 잃고 있는지 돌아보는 일은 더 필요합니다. 인간의 치열한 판단보다 기계의 매끄러운 계산이 더 신뢰받는 시대에, 우리는 인간으로서 무엇을 끝까지 붙들고 살아가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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