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트위터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남자인] 친구가 여자친구를 사귀고 싶다길래 이유를 물어보니 맛집도 가고 싶고 SNS에서 본 카페도 가고 싶은데 여자친구가 없으면 못 가니 그런다고 한다." 상상도 못한 이유에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아마 비남성)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런 곳에 왜 혼자 가지 못하는 거지? 아니, 혼자 못 가겠으면 친구랑 가면 되잖아?'
평소 남성 호모소셜의 문화를 접할 기회가 많이 없었던 나는 해당 게시물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최근 광장에서 2030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들이 발언을 통해 남성우정 문화의 유해성을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발언자들이 입을 모아 동성 친구들에 대한 회의감을 토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불만을 품는 사람은 광장에 나올 정도로 주류에서 벗어난 극소수뿐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친구 간에 특별한 이벤트는 무용하고 오글거린다며 피하는 모습, 축구장과 PC방과 술집을 근거지로 삼는 모습, 제육을 먹으며 주로 주식과 비트코인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등등. 이는 나에게 여러 미디어와 밈을 통해 '만들어진' 남성우정의 모습이긴 했지만 이제까지 (심지어 별로 본인에게 해당하지 않는데도) 이 이미지 자체를 싫어하는 남자는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오히려 자신들의 '유쾌하고 진실된' 우정 양식에 은근한 자부심을 내비쳤으면 몰라도 말이다. 그래서 대다수는 그들 자신의 문화에 흡족하며 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친구들끼리는 카페도 같이 못 간다니. 너무 이상했다. 남자들의 우정이 궁금해졌다. 남자에게 친구는 뭐지? 남자들은 친구 관계에서 대체 무엇을 원하는 거지?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 영국의 남성 스탠드업 코미디언 맥스 디킨스가 이러한 의문을 품고 1년간 '남성 우정'에 대해 종횡무진 탐구한 과정을 담은 소상한 보고서다. 맥스의 탐구는 자신의 여자친구 나오미에게 프러포즈할 계획을 취소하며 시작된다. 프러포즈가 성공해도 자신에겐 결혼식 들러리로 세울 친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후 ‘결혼하려는데 신랑 들러리가 없어요’라고 구글에 검색한 맥스는 거의 십억 건에 달하는 검색 결과를 보고 자신을 비롯한 많은 남자들이 친구관계에 문제를 겪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맥스는 대체 왜 이런 일이 나타났는지,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탐구에 착수한다.
맥스는 젠더부터 역사·문화·과학·기술적 관점까지 다양한 측면에서 남성 우정을 살펴보며 연구, 통계 자료, 기사, 인터뷰 등의 다채로운 자료를 저자 자신의 생생한 경험과 솜씨 좋게 엮어낸다. 독자는 맥스의 여정을 따라가며 여성성과 남성성이라는 이분법적이고 유성애적인 젠더 규범이 우정의 양식을 형성하고 영향을 주는 구체적인 방식을 볼 수 있으며, 젠더 이외에도 현대 기술과 외로움을 이용하는 산업사회가 인간관계에 끼치는 영향을 돌아볼 수 있다.
또한 맥스는 동성 친구들과의 우정을 회복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탐구를 통해 깨달은 내용을 그때그때 반영하여 다양한 시도를 한다. 맥스는 이 프로젝트 끝에 결국 결혼식 들러리를 구할 수 있을까? 1년간의 처절한(?) 충격과 반성, 노력 끝에 친구에게 진실한 마음을 고백하는 맥스의 모습을 보면 깔깔 웃다가도 마지막 화에선 코끝이 찡해지는 시트콤 한 편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맥스는 책을 시작하기 전 한 가지 주의사항을 알려준다. "이 책은 나의 개인적 경험을 다루었기에 그 범위가 백인, 중산층, 이성애자 등에 제한되어 있다." 이건 자신이 이 주제를 다루기에 매우 적합함을 은근슬쩍 어필한 게 아닐까? 사회에서 통용되는 '정상성'을 충족하는 남성우정의 독소를 다루려면 내부자의 시선이 필요한 법이다. 『여성 거세당하다』라는 페미니즘 책을 읽었다고 자신에겐 '유해한 남성성'이 없을 거라 철석같이 믿는 모습을 보면 저자는 완벽하게 자격이 있다.
읽으면서 젠더 규범에 따라 여성과 남성의 우정 양상이 다르게 나타나고 그게 남성들이 스스로를 고립시키게 만든다는 점도 인상 깊었지만 제일 인상 깊었던 부분은 '우정' 자체에 대한 훌륭한 고찰이었다. 『남자는 왜 친구가 없는가』를 읽으며 '어른으로서 친구가 된다는'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었다. 저자는 상황이 친구와 나를 묶어주었던 어린 시절과는 달리 어른이 되어서도 우정을 유지하려면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정은 우리에게 상당한 정신적 부담을 준다. 스케줄을 조정해 날짜를 잡고, 만날 장소를 알아보고, 꾸준히 연락하고, 기념일을 챙기는 일을 동시다발적으로 해내야 한다. 진정한 우정은 '자주 연락하지 않아도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은 어쩌면 이런 정신적 부담을 피하기 위해 쓰는 말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우정에서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지 몸소 보여준다. 저자는 망가진 줄도 모르고 망가져버린 우정을 회복하기 위해 행동하기 시작한다. 오래전 연락이 끊긴 친구에게 연락하고, 고마움을 진솔하게 전하고, 먼저 나서서 모임을 조직하고, 친구의 기쁜 소식에 축하 카드를 보낸다. 물론 처음 하는 시도인 만큼 완벽하게 해내진 못하지만 그래서 저자의 노력이 더 와닿는지도 모른다. 우정을 위한다면 행동해야 한다. 마음은 행위 없이는 보이지 않는 법이고, 이건 우정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아는 친구'는 판타지다.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특정 시기의 축복 하에서만 가능하다. “이 관계는 나에게 중요하고 나는 이 관계를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어”라는 메시지는 행동 하나하나가 쌓여 전달될 뿐이다.
책을 읽던 시기에 우연찮게 친구들과의 약속이 연달아 생겼다. 책을 읽으며 행동과 표현의 중요성을 실감했기에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거절했을 자리에 나가기로 했고, 친구를 만나서는 평소와는 달리 내 고민들과 생각들을 유머로 포장하지 않고 진지하게 말할 수 있었다. 덕분에 최근 좀처럼 채워지지 않던 우정에 대한 갈증이 해소되는 느낌을 안고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저자가 머리말에 자신의 책이 '우정 사용 설명서'가 되길 바란다고 했을 땐 남자들을 겨냥해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결국 나도 이 설명서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나처럼 시간의 흐름 앞에, 혹은 여러 이유로 우정에 대한 회의가 드는 사람이 있다면 많은 힌트를 얻을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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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