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kumyeeun의 서재
  • 부영사
  • 마르그리트 뒤라스
  • 10,800원 (10%600)
  • 2024-03-27
  • : 909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영사』는 여러 이야기가 무작위로 섞인 독특한 형식의 책이다. 출판사 책소개처럼 나도 책을 읽으면서 무질서에 나름의 질서를 부여하게 됐는데, 그건 『부영사』를 두 가지 이야기로 나누는 것이었다. 하나는 캘커타의 걸인 여자 이야기였고, 나머지 하나는 부영사와 안-마리 스트레테르를 포함한 대사관의 백인들이 나오는 이야기였다. 이런 구분에는 물론 장소나 인종같은 특징이 영향을 끼쳤겠지만, 가장 중요한 기준은 '내가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의 슬픔(고통)을 얼마나 이해하는가'였던 것 같다.

"초기에 겪었던 굶주림은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부영사』는 한 소녀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 소녀는 캘커타에 사는 한 걸인 여자의 과거이다. 소녀는 임신한 몸으로 집에서 쫓겨났고, 캄보디아의 바탐방에서 인도의 캘커타까지 계속해서 길을 걷는다. 걸인 여자의 이야기는 전체 책의 분량에 비해 짧지만, 여자의 이야기가 나오는 동안에는 끊어지지 않는다. 소녀의 걸음을 따라가며 나는 여자가 어떻게 걸인이 됐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소녀의 시선으로 구더기가 나오는 발과 슈거애플나무의 그늘을 전부 볼 수 있었고, 그 때문에 모든 것을 잊은 채 '바탐방'을 외치는 여자를 이해할 수 있었다.

"더 이상 말하지 말아요. 더 이상 그에 대해 생각하지 말아요."
반면, 걸인 여자와 철책을 사이에 두고 그 안에 있는 백인 인물들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속을 알 수 없는 인물들 같았다.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는 다른 인물들의 입을 통해서만 알 수 있었다. 또 그만큼 백인들은 모이면 주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한다. 그들은 특히 '부영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부영사는 라호르에서 '의문의 사고'를 친 후 캘커타로 옮겨져 처분을 기다리는 인물이다. 사람들은 사고의 근원을 알기 위해 부영사의 과거를 궁금해하고, 부영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주시하고, 부영사에 대한 소문을 퍼나른다.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 알 수 있는 그런 정보들은 알맹이가 없어서 내가 그를 이해하긴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이렇게 부영사에게 쏠린 사람들의 궁금증과는 달리 정작 부영사가 다른 사람과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자 할 땐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부영사와 협회장의 대화에서 부영사는 자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협회장은 관심이 없어보인다. 협회장은 하품을 한다. 그리고 협회장은 부영사가 때때로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한다.

"나를 단 한 번만이라도 여기 남아 있게 내버려 두시오."
팔각의 무도장에서 펼쳐지는 연회 장면은(p.101~) 내가 부영사를 알아가는 것을 책이 막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파티에서 부영사와 안-마리 스트레테르는 대화를 나누지만, 이 대화는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으로 조각조각 찢겨진다. 부영사는 이전에 협회장에게 안-마리 스트레테르를 두고 "나는 그녀를 슬픔으로 이해할 겁니다."(p.88)라고 말한 적이 있다. 연회장에서 이 마음을 안-마리 스트레테르에게 전하고자 하는 부영사의 모습은 장면 사이마다 삽입되는 '사람들은 말한다'라는 텍스트 자체에 의해 저지된다. 사람들은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말을 붙이며 나와 부영사 사이에 벽을 만든다. 슬픔을 나누려는 부영사의 시도는 뒤이어 사람들이 그를 연회장에서 쫓아내면서 이야기 속에서도 저지된다. 부영사는 자신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나는 남아 있겠소!"라며 소리치며 운다. 이 외침은 순식간에 사람들의 입을 타고 '돌연한 분노'가 되어 라호르에서 벌어진 사건의 증거가 될 운명을 획득한다. 이 지점에서 부영사가 참 쓸쓸해보였다. '안-마리 스트레테르를 슬픔으로 이해하겠다'는 말 속엔 '자신도 슬픔으로 이해받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결국 부영사는 캘커타의 백인 사이에서 쫓겨나고, 그는 나에게도 '알 수 없는 사람'으로 끝났다.

망망대해 같은 평원에선 슬픔은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되고 꽉 닫힌 팔각형의 무대에서 슬픔은 조각난다. 이 두 이야기의 대비를 보며 나는 타인의 슬픔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걸인 여자의 과거 이야기는 정말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소녀의 이야기는 피터 모건에 의해 쓰여진 것이다. 그리고 피터 모건은 부영사를 쫓아낸 안-마리 스트레테르 무리에 속해있다. 왜 피터 모건은 걸인 여자에 대해서는 그토록 알고 싶어하면서도 부영사에 대해선 알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왜 걸인 여자의 슬픔(고통, 광기)은 재현할 만한 대상이고 부영사의 슬픔은 쫓아내야 할 대상이었을까. 옮긴이의 말에서처럼 부영사의 파괴적 행위가 그들 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걸인 여자와의 다른 점일까.또 철책 안의 사람이 궁금증으로 만들어낸 이야기는 과연 여자의 슬픔을 담고 있을까. 여자를 잘 나타낸다고 생각했던 이야기가 가공된 것이라면, 결국 내가 실제로 알 수 있는 것은 슬픔의 조각일 뿐일까.책을 읽고 다른 사람의 슬픔을 알아보고 이해한다는 것에 대한 질문들이 많아졌다.

책의 특이한 형식만큼 읽을 때마다 집중되는 포인트나 감상이 달라질 책 같아서 다시 읽고 싶다. 재독할 때는 정말정말 알 수 없었던 인물인 안-마리 스트레테르에 집중해서 읽고 싶다. 그리고 『부영사』의 인물들이 나오는 『롤 V. 슈타인의 황홀』도 읽고 싶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