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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인폭스 갬빗
  • 이윤하
  • 15,300원 (10%850)
  • 2019-07-31
  • : 968
이윤하의 <나인폭스 갬빗>은 여러모로 신선하고 흥미진진한 작품이었다. 물론, 첫 장을 펼치면 익숙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밀리터리 스페이스 오페라답게 정부군과 저항군이 전쟁터에서 사활을 다투고 로봇이 돌아다니며 주인공은 명령을 내리기 바쁘니까.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개념이 하나둘씩 등장하고, 어느새 각종 진형, '폭풍 생성기', '경계면 탈곡기' 등 생소한 무기들, 각종 정부 분파 이름을 메모해놓느라 바빠진다. 그렇다고 머리가 아파지는 것은 아니다. 여섯 가지나 되는 정부 분파는 읽는 사이 분파별 특성이 저절로 생각날 정도로 개성이 확실하고, 진형과 무기들은 이 세계관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려주며 하나의 원리 아래 묶이기 때문이다. 이 원리는 사회 구성원들의 신념 체계에 기반을 둔 물리 체계, 즉 역법이다.

여기서 또 재미있는 점이 생긴다. <나인폭스 갬빗>의 육두정부는 세뇌와 전쟁을 기꺼이 활용하여 권력을 단단히 틀어쥐고 있지만, 구성원의 심리만 흔들면 쉽게 무너지기도 한다. 세계관 특성상 수학 능력이 매우 중시되지만, 심리를 제대로 파악하고 상대를 설득하지 못하면 진정한 승리를 거두지 못하는 세계관이라니. 주인공이자 수학천재인 체리스와 심리전 천재 제다오가 같은 신체를 공유하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젊은 장교 체리스와 400년 된 망령 제다오는 상반되는 성향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만 정부의 요구에 의해 체리스의 신체를 공유하게 된다. 이들의 임무는 불가능해 보이는 공성전을 승리로 이끄는 것. 당연히 둘 사이에 갈등이 생겨나고, 그 와중에 전투는 급박하게 돌아간다. 체리스는 광인 학살자 제다오를 견제하는 동시에 그와 협력해야 하고, 고속 승진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얕보는 함장들을 상대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며, 적을 제대로 파악하여 승리를 이끌어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손에 땀을 쥐고 주인공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1권이 끝나 있다. 당장 다음 권이 필요할 정도로 아쉬워진다.

일분일초를 다투며 갈수록 비정해지는 공성전도 충분히 흥미롭지만, <나인폭스 갬빗>이 더 흥미진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성 정체성과 섹슈얼리티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여성인 체리스는 여성 애인이 있었고, 남성인 제다오는 여성 애인과 남성 애인이 모두 있었으며, 이러한 면모는 캐릭터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소개된다. 또한 체리스는 제다오와 몸을 공유하면서 자신의 몸이 자신 것이 아닌 듯한 느낌에 한동안 고생한다. 젠더 디스포리아가 연상되는 대목이었다.

다양한 층위의 정체성 중 작품에서 가장 크게 다루어지는 것은 문화적 정체성이라고 느꼈다. 체리스는 육두정부의 켈 분파에 충성하지만, 동시에 육두정부가 정복한 지역 출신으로 고향에서의 이름을 잊지 않고 간직한다. 고향에서 떠나와, 안정적인 삶을 위해 가장 보수적이고 결속력이 강한 켈 분파를 택한 것이다. 현실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비록 SF 소설이지만 바로 옆의 현실을 보는 것 같았다.

이렇듯 <나인폭스 갬빗>은 생소한 요소와 익숙한 요소를 적절히 섞어 이야기를 풀어낸다. 주인공이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할 <레이븐 스트라타젬>은 어떻게 전개될지 벌써 기대하고 있다. 체리스의 정체성은 이야기에 어떤 식으로 작용할 것이며, 제다오의 다음 계획은 무엇일까? 확실한 건 <나인폭스 갬빗>보다도 더 예측 불가능한 재미를 자랑하리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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