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 사건들을 이렇게 해석한다면 우리를 목매달았던 그 닻줄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말장난 같지만 정말 ‘숨막히게‘ 척척 들어맞아요. 왜냐하면 초승달도 배처럼 생겼으니까요.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활, 아르테미스의 그믐달처럼 휘어진 그 활은 화살하나로 열두 개의 도끼를 한꺼번에 꿰뚫어버리는데, 여기서도 열둘이 나오죠! 그 화살이 꿰뚫고 지나간 것은 각각의 도끼 자루에 달린 고리였는데, 그것도 달처럼 둥그런 모양이구요! 그리고 교수형도 그래요. 교양 있는 분들이라면 이 교수형의 의미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지상을 떠나 허공에서, 배의 탯줄 같은 밧줄에 매달려, 달이 지배하는 바다와 연결된 상태...... 아, 이렇게 많은 단서가 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할 사람이 있을까요?- P193
그러니까 우리가 겁탈당하고 그후 교살당했다는 것은 어쩌면 달을 숭배하던 모계사회가 아버지신(神)을 받드는 이방인들의 침략으로 무너져버린 사건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방인들의 우두머리, 즉 오디세우스가 우리 교단의 대제사장, 즉 페넬로페와 결혼하여 왕이 되었다는 거죠.- P194
활쏘기 시합은 가부장제 이전의 체제에도 있었겠지만 그때는 아마 격식에 따라 제대로 치러졌을 겁니다. 승리자는 한 해 동안 상징적인 왕이 되었다가 교수형을 당하는 거죠. 지금은 천박한 타로카드 한 장에 남아 있을 뿐이지만 ‘목매달린 남자‘ 의 모티프는 다들 아시지요? 그는 아마 성기도 잘렸을 겁니다. 여왕벌과 결혼한 수벌에게 걸맞은 최후죠. 이 두 가지 행위, 즉 교수형과 성기 절단은 농작물의 다산을 기원하는 의식이었어요. 그러나 왕권을 빼앗은 강자 오디세우스는 정당한 재위 기간이 끝났는데도 죽기를 거부했습니다. 수명 연장과 권력에 대한 욕심 때문에 자신의 대역을 찾은 거죠. 성기가 절단되기는 했지만 그건 오디세우스의 성기가 아니라 염소치기 멜란티오스의 성기였어요. 그리고 교수형도 집행되었지만 오디세우스 대신에 우리 열두 명의 달처녀가 목매달렸던 거예요.- P196
나는 그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장밋빛 환상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자기도 어엿한 성인 남자라는 환상, 그리고 닭장을 다스리는 두 마리 수탉처럼 두 사람이 한편이 되어 나를 상대한다는 환상 말이다. 물론 나는 텔레마코스가 잘되기를 바랐다. 그는 엄연히 내 아들이고, 따라서 나는 그가 정치 지도자나 전사나 그 밖에 또 뭐가 되고 싶어하든 간에 부디 성공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날 그 순간만은 차라리 트로이아 전쟁이라도 한 번 더 일어나서 녀석을 싸움터로 보내버렸으면 속이 다 시원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겨우 수염이 나기 시작한 사내녀석들은 가끔 그렇게 눈엣가시처럼 보일 때가 있다.- P198
그는 자기가 했던 수많은 거짓말과 자기가 사용했던 가짜 이름들에 대해 그런 속임수 중에서도 가장 재치 있었던 것은 (비록 쓸데없이 빼기다가 낭패를 보긴 했지만) 키클롭스에게 자기 이름이 ‘아무도아니‘ 라고 말해준 것이었다-그리고 자신의 정체와 속셈을 좀더 잘 감추기 위해 가짜로 꾸며냈던 인생 역정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나는 그에게 구혼자들에 대한 이야기, 라에르테스의 수의를 가지고 속임수를 썼던 일, 남몰래 구혼자들을 부추겼던 일, 그리고 교묘한 방법으로 그들을 유도하고 꼬드겨 서로 반목하게 만들었던 일 따위를 들려주었다.- P201
우리 두 사람은 - 스스로도 인정했듯이 - 오랫동안 거짓말을 일삼았던 능숙하고 뻔뻔스러운 거짓말쟁이들이었다. 그런데도 서로의 말을 한 마디라도 믿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러나 우리는 믿었다.
적어도 말로는 서로 믿는다고 했다.- P202
피고측 변호인: 제 의뢰인의 적들이었습니다. 판사님.
의뢰인의 목을 절개(切開)하고 그 아내의 절개(節槪)를 훔치려던 자들이었지요.- P208
판사: 이게 무슨 소란이오? 정숙하시오! 정숙! 이곳은 21세기의 법정이란 말입니다! 거기 당신들, 천장에서 내려오시오! 컹컹거리고 쉭쉭거리는 소리도 그만 내요! 이봐요. 아가씨*, 가슴 좀 가리고 그 창도 얼른 내려놔요! 그런데 이 구름은 뭐야? 경비들은 어디 있나? 피고는 또 어디 갔지? 다들 어디로 간거야?- P214
나는 우쭐거리는 그녀를 기죽이려고 이렇게 말해본다.
"내가 듣기론 트로이아 전쟁에 대한 해석이 좀 달라졌다더라. 요즘 사람들은 언니가 그저 신화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교역로에 대한 비유였다는 거야. 학자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어."- P218
이봐요! ‘아무도아니‘ 씨! 아무개씨! 속임수의 대가씨! 도둑과 거짓말쟁이들의 손자, 손재간의 천재씨!
우리도 여기 있어요. 이름 없는 여자들. 이름 없고 보잘것없는 여자들. 남들이 불명예를 씌워놓은 여자들. 손가락질받는 여자들, 손장난당하는 여자들.
허드렛일 하는 여자들, 두 뺨이 화사한 여자들, 킥킥거리며 웃어대는 육감적인 여자들, 살랑살랑 몸 흔드는 뻔뻔스러운 여자들, 핏물을 닦아내는 젊은 여자들.
우리는 열두 명. 달덩이 같은 열두 명의 매춘부, 열두 개의 달콤한 입술, 깃털 베개처럼 폭신한 스물네 개의 젖가슴, 그리고 무엇보다, 움찔움찔 경련하는 스물네 개의 발.- P222
제29장 맺음말
우리에겐 목소리도 없고
우리에겐 이름도 없고
우리에겐 선택권도 없고
우리에겐 하나의 얼굴
똑같은 한 얼굴뿐이었지요
우리는 누명을 썼고
억울한 일이었지만
이제는 여기 모여 있어요
당신이 그렇듯이
우리도 모두 여기 있어요
그리고 이제 우리
당신 뒤를 따르렵니다
당신, 거기 계시네요
당신에게 외칩니다
후잇후우
후잇후우
후우우"
시녀들의 몸에서 깃털이 돋아나더니 올빼미가 되어 날아간다.
* 이 소설의 대미를 장식하는 올빼미들의 음산한 울음소리 (‘후잇 후우‘)는 우리말식 의성어로 바꾼 것이다. 원서에는 ‘투윗 투우(too wit too woo)‘로 되어 있다. 그런데 영어에서 ‘윗(wit)‘은 재치 또는 지혜, 동사로는 ‘알다‘ 라는 의미를 가졌고, ‘우(woo)‘는 ‘구애하다, 구혼하다. 사랑을 호소하다‘ 라는 뜻이다. 비록 이 철자가 올빼미 울음의 의성어로 흔히 쓰이기는 하지만, 작품의 내용에 비춰볼 때 작가는 이 시에서 중층적 (重層的) 의미를 의도한 듯하다.- P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