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책을 가슴에 껴안자 그 차가운 감촉이 내 몸을 덥혀주었다. 어머니가 아이를 품에 안듯이 나는 힘주어 책을 품에 안았다. 너무 세게 안은 성서가 반쯤 몸속으로 파고든, 콜린 광장의 얀 후스 조각상처럼.
-알라딘 eBook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중에서- P97
한 변이 적어도 오백 미터는 되는 저 정육면체에 프라하 전체가 나와 함께 압축되어 있다. 평생에 걸쳐 내 안으로 스며들었던 텍스트들과 내 모든 사고도 함께…… 내 삶이라고 해봐야, 저 아래 내 지하실에서 사회주의 노동단원 두 명이 짓이겨대는 작은 생쥐 한 마리만도 못한 것이긴 하지만……
-알라딘 eBook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중에서- P104
하지만 내가 본 건 이 후광이 아니라 커다란 금빛 욕조였다. 이제 막 칼로 자신의 손목 동맥을 자른 세네카가 거기 누워 있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사고가 정확했음을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였고, 내가 좋아하는 책 『마음의 평정에 관하여』를 쓴 것이 헛일이 아니었음을 입증하고 있었다.
-알라딘 eBook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중에서- P106
이카루스는 하늘에서 떨어져 바닷속에서 산산조각났다는 것만이 예수와의 유일한 차이점이었다. 반면 추력 180톤의 아틀라스 로켓은 예수를 지구의 궤도 위에 올려놓았고 오늘날에도 예수가 이곳에 군림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알라딘 eBook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중에서- P98
예수가 낙관의 소용돌이라면, 노자는 출구 없는 원이다. 예수가 극적인 갈등 상황과 싸우고 있다면, 노자는 도덕과 관련된 상반되는 요소들의 풀리지 않는 문제를 조용히 명상한다.
-알라딘 eBook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중에서- P46
그러자 윔블던 대회에서 우승을 막 거머쥔 테니스 선수처럼 의기양양한 예수가 보였다. 반면 초라한 외관의 노자는 재고를 넉넉히 두고도 빈손처럼 보이는 장사꾼 같았다.
예수에게서는 상징과 암호로 이루어진 피 흘리는 현실이 읽혔지만, 수의에 싸인 노자는 엉성하게 다듬은 들보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만 있었다.
예수는 플레이보이 같았고, 노자는 내분비선이 고장난 노총각처럼 보였다.
예수는 오만한 손과 힘찬 몸짓으로 적들에게 저주를 내렸지만, 노자는 체념한 사람처럼 팔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알라딘 eBook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중에서- P52
예수가 낭만주의자라면, 노자는 고전주의자였다.
예수는 밀물이요 노자는 썰물,
예수가 봄이면 노자는 겨울이었다.
예수가 이웃에 대한 효율적인 사랑이라면, 노자는 허무의 정점이었다.
예수가 프로그레수스 아드 푸투룸*progressus ad futurum. ‘미래로의 전진’이라는 뜻.이라면, 노자는레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regressus ad originem. ‘근원으로의 후퇴’라는 뜻.이었다……
-알라딘 eBook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중에서- P53
카페 ‘검은 양조장’ 카운터에 기대앉아 나는 맥주 한 잔을 마신다. 이봐, 오늘부터 넌 혼자야. 홀로 세상에 맞서야 해. 마음이 안 내키더라도 사람들을 보러 나가 즐기고 연기를 해야 할 거야. 이 땅에 발붙이고 있는 동안은 말이야. 오늘부터는 수심에 찬 원들만 소용돌이치는군…… 전진이 곧 후퇴인 셈이지. 그래,프로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과레그레수스 아드 푸투룸은 같은 말이야. 너의 뇌는 압축기에 짓이겨진 한 꾸러미의 사고에 불과하지.
-알라딘 eBook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중에서- P107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마법의 방이 그렇다. 보름달이 뜬 어느 밤에 그 방에서 육손이 괴물이 시동 장치를 잘못 누르는 바람에 좌정한 밀랍 차르가 위협적인 모양새로 나타났다지. 유리 티냐노프의 『밀랍 형상』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 내용이다.
-알라딘 eBook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중에서- P108
이 구분선을 가톨릭 신부들은 더 높이, 목까지 끌어올렸다. 그들의 로만칼라는 머리가 우위임을, 하느님 자신이 거기에 직접 손가락을 담갔음을 말해주는 뚜렷한 표징에 불과하다.
-알라딘 eBook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중에서- P111
인간의 몸은 모래시계라는 생각이 든다. 위에 있던 것이 밑으로 가고 밑에 있던 것이 위로 가며, 두 개의 삼각형이 서로 통한다.
-알라딘 eBook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중에서- P111
솔로몬 왕의 봉인. 그의 젊은 시절 작품인 〈아가서〉와 노년의 결산인 〈전도서〉가 고백하는바니타스 바니타툼*vanitas vanitatum. ‘헛되고 헛되니’라는 뜻의 라틴어. 〈전도서〉 12장 2절. 사이의 균형
-알라딘 eBook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중에서- P112
사암으로 된 이 기독교 조각상들은 골을 성공시킨 뒤 양팔을 쳐들고 기쁨의 환성을 내지르는 축구선수를 닮았다…… 그러나 야로슬라프 브르흘리츠키의 조각상들은 휠체어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다.
-알라딘 eBook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중에서- P112
레스토랑 쪽으로 걸어내려가는데 누군가의 어깨 너머로 벽에 쓰인 글씨가 보였다. ‘이 자리에 있던 집에서 위대한 카렐 히네크 마하 시인이 「5월」을 썼다.’ 나는 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알라딘 eBook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중에서- P112
그는 내게 함께 건배하러 가자고 청했다. ‘그랜드 슬랄롬’*알파인스키 경기 종목(활강down hill, 회전slalom, 대회전grand slalom) 가운데 하나. 표고차 400미터 사면에 30개가량의 관문을 코스로 설정해놓고 통과하는 경기다. 여기서는 술집 투어를 ‘그랜드 슬랄롬’에 비유했다.을 끝까지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면서. 하지만 나는 딱 한 번 그 관문을 죄다 통과한 적이 있긴 해도 보통은 실패하고 말았던 터라 그런 건 잊은 지 오래였다. 단 하나의 문도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위해 그 친구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코스를 낱낱이 설명해주었다. 첫 관문은 ‘블라호브카’ 맥주홀, 그다음은 ‘작은 뿔’, 그리고 ‘실낙원’에서 한잔 걸치면 다음 관문은 ‘밀러’, 그리고 ‘방패’…… ‘야롤리메크’까지 버티려면 관문마다 고작 반 리터들이 맥주 한 컵씩만 마셔야 한다. 그러다 ‘라댜’에서 또 한 잔. ‘카렐 4세’에 살짝 들렀다 나오면 코앞에 셀프서비스 술집인 ‘세계’가 보인다. 그다음엔 느긋하게 ‘하우스만’의 문을 두드리고, 그곳을 나와 전찻길 건너편의 ‘선왕 바츨라프’로 간다. 그러고 나면 ‘푸딜’이나 ‘크로프타’가 남지만 ‘도우다’나 ‘수성’으로 못 갈 것도 없다…… 종착지는 ‘팔모프카’일 수도 있고, 셀프 주점인 ‘숄러’가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호르키’나 로키차니 타운으로 가서 성공을 자축할 수도 있겠지…… 신바람이 난 친구는 이 모든 여정에 마침표를 찍으며 나를 붙잡고 늘어졌지만, 나는 그 친구를 ‘치셰크’에 남겨둔 채 물러나 카렐 광장의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저기 무더기로 피어 있는 한련화들이 사람들의 얼굴을 연상시켰다…… 일광욕을 하러 나온 사람들이 벤치를 바꾸어 앉으며 석양을 좇고 있었다. 카페 ‘검은 양조장’으로 되돌아온 나는 럼주를 시킨 다음 맥주를 주문했고 다시 럼주를 시켰다. 우리는 만신창이가 된 다음에야 최상의 자신을 찾을 수 있다. 어두운 하늘에서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시청의 괘종시계가 네온 빛을 발했다.
-알라딘 eBook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중에서- P114
블타바 강의 바람이 카렐 광장까지 불어온다. 나는 이러고 있는 게 좋다. 저녁 시간에 레트나 대로를 걸어다니는 게 좋다. 공원 냄새, 싱그러운 풀과 나뭇잎 냄새가 강물에 실려와 이제 도로 위에 떠돈다. 나는 ‘부베니체크’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맥주 한 잔을 시킨 뒤 멍하니 앉아 있다…… 2톤의 책이 잠든 내 머리를 위협하며 호시탐탐 나를 덮치려고 한다. 스스로 걸어놓은 다모클레스의 검이다. 나는 형편없는 성적표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다. 술잔 안의 거품이 도깨비불처럼 표면 위로 떠오른다.
-알라딘 eBook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중에서- P115
나는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복제화 한 점을 내 상자에서 꺼내놓고, 성화들의 둥지 속에 숨어 있는 책들을 추려 마침내 한 페이지를 고른다.
-알라딘 eBook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중에서- P117
나는 녹색 버튼의 작동을 중단하고 폐지가 가득한 압축통 속에 나를 위한 작은 은신처를 마련한다. 아무렴, 나는 여전히 쾌활한 사내다. 그런 내가 자랑스럽고,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욕조에 들어가는 세네카처럼 나는 한쪽 다리를 압축통에 넣고 잠시 기다린다. 다른 한쪽 다리도 마저 통 안으로 무겁게 떨어져내린다. 나는 똬리를 틀고 살핀 다음 무릎을 꿇은 자세로 녹색 버튼을 누르고 완충물인 책과 폐지 속에서 몸을 웅크린다. 한 손에 들린 나의 노발리스를 꽉 쥔다. 내가 좋아하는 글귀에 손가락이 올라가고, 입술엔 지복至福의 미소가 떠오른다. 나는 만차와 그녀의 천사를 닮기 시작했으니까…… 이제 완전한 미지의 세계로 진입한다. 책을, 책장을, 쥐고 있다…… 사랑받는 대상은 모두 지상의 천국 한복판에 있다, 라고 쓰여 있다…… 멜란트리흐 인쇄소 지하실에서 백지를 꾸리느니 여기 내 지하실에서 종말을 맞기로 했다. 난 세네카요 소크라테스다. 내 승천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압축통 벽에 눌려 내 다리와 턱이 들러붙고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이 이어진다 해도 결단코 두 손 놓고 천국에서 추방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무엇도 나를 내 지하실에서 몰아낼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자리를 바꾸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책의 단면이 내 늑골을 뚫고 들어온다. 입에서 비명이 새어나온다. 궁극의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가혹한 고문을 겪는 것일까? 압축기의 중압에 내 몸이 아이들의 주머니칼처럼 둘로 접힌다…… 그 순간 내 집시 여자가 보인다. 끝내 이름을 알 수 없었던 어린 여자. ‘민둥산’이 선명하게 자태를 드러낸다. 우리는 가을 하늘에 연을 날린다. 그녀가 연줄을 쥐고 있다…… 저 위를 올려다보니 연이 비통한 내 얼굴을 하고 있다. 집시 여자가 밑에서 보내는 메시지 하나가 연줄을 타고 올라간다. 메시지가 불규칙적으로 흔들리며 전진해 마침내 나와 닿을 거리에 이른다. 나는 손을 내민다…… 어린아이가 쓴 듯한 큼직한 글씨가 쓰여 있다.일론카. 그렇다, 이젠 분명히 알 수 있다.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었다.
-알라딘 eBook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중에서- P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