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거나 모든 존재는 몸이라는 생명 유지 장치 속에서 살아가며 그 역시 언젠가 필연적으로 고장 나게 되어 있다. 이들을 태운 장치는 물론 위태롭다고 하겠지만 궤도의 리듬을 벗어나지 않는다. 궤도 위에서 뜻밖의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예측 못 할 일도 모조리 예측된다.
-알라딘 eBook <궤도> (서맨사 하비) 중에서- P32
가끔은 놀라운 생각을 한다. 자신들이 진공 심연을 홀로 지나는 잠수함을 타고 있다는 생각. 밖으로 나가면 안전할 것 같지 않다. 지구 표면에 다시 떨어졌을 때 이들은 생경한 존재들이리라. 미쳐 버린 낯선 세상을 배우러 온 외계인들.
-알라딘 eBook <궤도> (서맨사 하비) 중에서- P32
여자는 비좁은 계단에 늘어져 있다. 여자 몸도 계단처럼 가늘다. 나무 빗자루와 같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주변에는 온통 나무뿐 인간은 없다. 그래서 그녀도 지지 않으려고 스스로 나무가 되었다.
-알라딘 eBook <궤도> (서맨사 하비) 중에서- P34
자신의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녀는 평생 그런 적 없었지만 이른 저녁 이렇게 바깥 계단에 나와 있다. 늦은 일탈, 사춘기의 반항 같은 몸짓으로 거칠고 낡은 빗자루가 되었다. 그녀는 헛소리라면 질색하는 성격인데. 천천히 혈류가 느려지고 모든 게 느려진다. 요 몇 주 동안 몸이 심상치 않았다. 하늘에 점 박혀 움직이고 있는 빛을 보려고 고개를 들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로 지구 궤도를 6만 번쯤 돌았을 그 점을 찾아보며, 딸이 돌아올 때까지 한 달만 더 기다려 보자 생각했다.
-알라딘 eBook <궤도> (서맨사 하비) 중에서- P34
어떤 일도 하기 싫어진다. 다 내버려두고 그냥 쳐다보고만 싶다. 작은 공간에서 지구의 구석구석을 훤히 알고 싶다. 별들은 절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어도 지구는 타인을 알아 가듯 알 수 있다. 마치 숀이 굶주리고 이기적인 갈망에 끌려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아내를 알아 갔듯이. 그는 그렇게 조금씩 지구를 알고 싶다.
-알라딘 eBook <궤도> (서맨사 하비) 중에서- P39
그러게, 안톤이 대답하며 으쓱한다. 로만도 으쓱하고 만다. 애초에 이들은 힘을 얻으려고 우주에 온 게 아니다. 모든 걸 더 많이 얻고 더 많이 알고 더 겸허해지려고 왔다. 속도와 정지. 거리와 친밀. 덜해지고 더해지는 것. 이들은 자신들이 작은 존재임을, 아니,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는다.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는체외 세포들을 왕창 키우는 이들은, 이 순간 자신들이 살아 있는 것이 빈약하게 뛰는 심장 속 이런 세포들에 달려 있음을 안다.
-알라딘 eBook <궤도> (서맨사 하비) 중에서- P40
칠흑같이 어두운 방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거울처럼 빛나는 지구를 향해, 지지직대는 무전기를 들고 오직 그곳에만 존재하는 듯한 생명체에게 말을 건네고 싶다고. 여보세요?곤니치와,차오,즈드라스테,봉주르, 거기 들리나요, 여보세요?
-알라딘 eBook <궤도> (서맨사 하비) 중에서- P45
한편으로는 반발심이 든다. 쉬쉬하며 나누지 않지만, 모두가 느끼고 있다. 갑자기 시시해진 자기들 삶에 반발하는 마음이다. 지구에 묶여 어디로도 향하지 않는 궤도는 시시하다. 이들은 궤도를 빙빙 돌기만 할 뿐 절대빠져나가지 않는다. 단 하나의 궤도만 아는 충직한 선회는 어젯밤 이들에게 겸허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정성을 쏟고 떠받드는 듯한 감각, 일종의 경배. 그래도 달로 떠난 우주비행사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잠들기 전에 창밖을 내다봤다. 기대감에 잠을 설쳤지만 정작 꿈에 나타난 것은 달이 아니라 우주선 바깥의 거친 우주 정원이었다. 언젠가 다들 한 번쯤 거닐었던 정원. 그리고 언제나처럼 강렬하게 푸르른 빛을 띠고 끌어당기는 지구.
-알라딘 eBook <궤도> (서맨사 하비) 중에서- P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