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는 정진주이다. 이 책은 ‘왜 살아야만 하나’ 회의에 빠진 사람들, ‘너무 늦었어’, ‘내가 된다고 될까’ 포기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세상에 나온 이야기이다. 또한 이 책은 패션을 사랑하는 한 여성으로서 패션계에 보내는 연가이기도 하다. 이 책은 만화로 되어 있어서 순식간에 읽을 수 있다.
제목에 악마가 왜 있나했는데 악마가 등장해서 디올에서 도전이나 시도를 하지 말고 죽으라고 계속 꼬신다. 디올은 듣지 않고 무수한 도전을 하는 불굴의 인간이다. 디올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정원을 잘 가꾸는 어머니옆에서 꽇을 가꾸거나 옷을 만들어 자신의 할머니에게 칭찬을 듣는다.
예술대학을 가고 싶어하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정치학을 전공하고 대학에 가서 공부보다는 연극에서 의상을 담당한다. 취직을 못하니까 아버지가 갤러리를 차려줘서 그림을 팔기 시작하는데 그때가 대공항, 2차대전때라서 전부 망하고 그림을 헐값에 파는데 그때 피카소 그림도 있었다.
취직을 못해서 친구들 집을 전전하다가 결핵에 걸리고 아버지 사업이 망하고 형은 정신병에 걸리고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여동생은 나치반대를 하다가 수용소에 잡혀 간다. 디올은 건강을 회복하고 파리에 다시 와서 의상 디자인 그림을 그리는데 그걸로 돈을 벌다가 다시 전쟁터에 징집되고 전쟁터에서 농사짓는 법을 배운다.
전쟁터에서 돌아와 콩을 키우고 팔면서 아버지와 여동생과 생활하다가 다시 파리의 의상디자인에 취직을 한다. 그는 거기서 지금의 유명한 명품을 만든 사람들을 다 만나는 것 같다. 난 프랑스나 이태리 명품의 스타일이 잘 안 맞는 것 같아서 선호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 스타일들이 마음에 들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했을지 모른다.

난 일본 스타일을 좋아해서 일본 패션의 잡지나 공부를 더 많이 한다. 편하고 무지, 무늬가 있어도 거의 작은 무늬들을 선호한다. 세련되고 깨끗하고 너무 요란하지 않는 패션이 좋은 것 같다. 디올의 패션은 아름다운 면이 있기는 한 것 같다.
“크리스찬 디올의 첫 번째 컬렉션은 패션의 역사상 정말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세계 폐션사2』, J. 앤더슨 블랙, 매쥐 가랜드, 1947년 2월 12일, 42세의 디올이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한 첫 번째 패션쇼의 성공 이후, 뉴 룩은 전 세계를 휩쓸게 됐다.
이전의 남성적인 넓은 어깨선, 좁은 스커트, 군복 스타일의 딱딱한 라인과는 달리 여성적인 좁은 , 가는 허리, 풍성한 스커트, 라인으로 대표되는 뉴 룩의 스타일은 제2차 대전이라는 전 인류적 참상 이후 패션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여성들의 옷차림이 바뀐다는 건 세상의 표정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봄이 오면 헐벗은 동산에 진달래꽃부터 먼저 피어나듯이, 전쟁 직후 황폐화된 세상에 문명세계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미리 소환해 낸 것이다. 한순간에 역사의 물줄기가 바뀌었다.
70여 년이지나 80년에 가까워 오는 2020년대 중반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일은 패션사에 전무후무하다. 뉴룩은 혁명이었으나 회복이라 부를 수 있는 성격의 것이었다. 근원적인, 고전적인 여성미의 재발견, 아니 부활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사람들이 무엇보다 바라고 있던 것이 바로 ‘그것’ 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내가 지닌 취향이 우연찮게 시대적 요구와 맞아 떨어졌을 뿐”이라는 디올의 고백처럼 잿더미가 된 폐허에서는 먼저 꽃부터 피어나야 했던 것이다. 놀랍게도 옷감의 부족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도 커튼으로 드레스를 해입었는데, 낙하산 천으로 블라우스 만들어 입던 여자들 입던 여자들이 못할 건 또 뭐가 있었겠나.
전쟁 내내 다들 자급자족하는 데 이골이 나서 바느질에 도가 튼 터라 값비싼 디올의 옷을 직접 사 입지 못하는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극복하지 못할 문제란 없었다. 중요한 건 그가 제시한 방향이었고, 대중이든 디자이너든 이제 새로운 길에서 마음껏 자신들의 창의력을 발휘하면 되는 일이었다.
쟁쟁한 디자이너들이 일제히 디올이 제시한 좌표 (좁은 어깨, 가는 허리, 풍성한 스커트)대표로 포문을 열기 시작한 덕에 우리에게 친숙한 헐리웃 영화의 황금기-여성은 가장 여성답고 남성은 가장 남성다웠던 시기-에 ‘세기의 연인들’ 의 비주얼이 그렇게 탄생되었다. 뉴 룩 발표 후 2년 뒤인 1949년, 크리스찬 디올 브랜드는 프랑스 전체 의류 수출 물량의 75%를, 프랑스 대외무역량의 5%를 차지하게 됐다.
그러나 ‘프랑스 패션을 구해 냈다’는 칭송을 들으며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는 것이나 디자이너 최초로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한 것 등은 자신에게 농사꾼 기질이 있으며, 농사짓는 걸 아주 좋아했다 밝힌 이 디자이너의 소박한 꿈에 비하면 오히려 작은 일처럼 느껴진다. “알퐁스 도데의 말처럼 작품들을 통해 행복을 파는 상인이 되고 싶다.”
전쟁으로 누더기가 되어 버린 사람들의 마음에 ‘사랑’, ‘애정’, ‘행복’, ‘꽃부리’-디올의 초기 컬렉션 작품들의 이름을 선사하는 것, 나라 잃고 시골서 농사짓고 콩 팔러 다니던 아재가 촛불 아래 그림을 그리며 꾸던 꿈을 이루었다. 디올은 사랑과 애정으로 행복하게 꽃 피어날 것을 기원하고 싶어 했다.
★디올은 뉴룩 발표 10년 뒤인 1957년, 52세 나이에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기까지 많은 여성들에게 행복을 선물했다. 성공의 정점에 있었는데 그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오드리 헵번이 입은 예쁜 옷들중에 디올의 옷들도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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