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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자, 별 하나
다니엘 수업
ys로스쿨러  2025/04/19 17:24
  • 다니엘 수업
  • 박양규
  • 17,820원 (10%990)
  • 2025-03-25
  • : 3,500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성경은 조금씩 읽고 이런 신앙서적을 많이 읽으면서 하나님을 절실히, 깊이 사랑하게 됐다. 지금은 성경의 여러 버전을 읽으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감동을 받고 말씀의 실체와 현실성을 대면하고 있다. 성경와 신앙서적을 함께 읽는 것이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신앙이 성숙해지는 것 같다. 성경은 옛날책인데 어떻게 믿냐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저자가 쓴 책을 보니까 성경의 역사성, 실제성을 강조하는 것 같았다. 성경은 신화가 아니고 살아있는 말씀이 맞다.

대영박물관에서 다니엘서를 역사성으로 만날 수 있다고 해서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이 그런 경험을 하게 해준다면 정말 귀한 경험인 것 같다. 저자의 중간사 수업을 읽었는데 구약과 신약과의 시간적인 갭도 컸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난 성경이 가장 사랑하는 책이고 여러 버전으로 읽으니까 정말 도움이 됐다. 성경이 내 삶의 실제성으로 살아서 역사하길 난 항상 믿는다. 그런 성경에 대한 무게감을 저자가 알려준다니 정말 감사하게 본 책이다.

저자 박영규는 교회 교육 콘텐츠에 관한 한 독보적인 저자는 설교자이자 역사가, 인문학자다. ‘한 번도 듣지 못한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들은 사람 없다’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그의 강의와 저서는 수많은 독자와 학생들이 열광한다. 역사, 인문학, 예술을 넘나들며 성경을 가르치고 있으며, 특히 신구약 중간사 분야에서 국내 최고의 강의로 손꼽힌다. 시그니처 저서『중간사 수업』은 종교 분야 1위에 올랐으며(2024), 후속작『다니엘 수업』은 한국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획된 성경 수업 시리즈 3종 중 두 번째 책이다.

저자는 대영박물관의 역사성은 물론 동시대의 문헌과 자료를 접목해서 성경을 풀어냈다. 총신대 신학과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서양학과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영국애버딘대학교에서 신구약 중간사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삼일교회에서 교육을 총괄했으며, 현재 삼일교회 협동목사이다. 소명학교와 푸른나무학교에서 교육자로 활동하며 동료 교사와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이 책은 다니엘서를 다루는 기본 태도를 짚어 보고, 전체 성경의 역사와 다니엘의 흐름을 정리했다. 특히 성경 역사의 흐름을 시대마다 단절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세상의 ‘도전’ 과 하나님 자신의 ‘응전’구도로 나누었는데, 이는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가 역사를 대하는 시선을 참고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신학자 중 상당수가 성경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창조, 부활, 동정녀탄생, 재림 등이 그저 교훈을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면 기독교는 어떻게 이어져 왔을까? 다니엘은 신학자들이 역사성을 간과하는 대표적 인물이다. 실제로 다니엘을 가리켜 주전 2세기 마카비 시대에 ‘고안된’ 허구의 인물이라는 신학자가 꽤 많다. 다니엘은 주전 6세기 바벨론의 고고한 유물이 증명하고, 주후 1세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도 그에게 역사성을 부여한다.



18세기까지 허구로 여겼던 구약의 기록들이 19세기부터 고고학 유물이 새롭게 발굴되면서 종전의 입장을 수정하는 사례들이 늘고 있다. 다니엘의 예언과 역사성에 놀랐다는 기록이 있다. 다니엘의 역사성은 충분히 신뢰할 만하다. 구약 성경에 언급된 다니엘은 대략 주전 7-6세기에 활동했다. 대영박물관은 세계에서 가장 큰 박물관 중 하나이다. 성경의 역사성을 확인할 수 있는 전시물이 무척 많다. 이렇게 전시물을 통해 성경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것이 성경의 역사성이다. 너무 감동적인 얘기다.

히스기야는 처음 왕으로 즉위했을 때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하나님만을 의지했다. 그러나 얼마간 시간이 지난 아시리아가 침공했을 때는, 성전의 벽에 입힌 금붙이까지 긁어서 조공을 바치는 나약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라기스를 무너뜨린 산헤립이 히스기야를 새장에 갇힌 새처럼 간주하며 협박의 서신을 보냈을 때, 히스기야는 그 서신을 들고 성전에 가서 기도했다. 바로 이때 ‘히스기야의 기도’가 탄생했다. 우리는 이 맥락을 주목해야 한다. 달라진 것은 히스기야가 의지하는 대상뿐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그의 나라를 드러내시는 진심이다.

히스기아가 기도하자,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셨다고 확인해 주었다. 히스기야를 새장 안에 가두었고, 항복할 것을 회유하며 조롱했던 산헤립이 어째서 이유 없이 퇴각한 것일까?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나느웨에 거주하더니 그가 그의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아드람멜렉과 사례셀이 그를 칼로 쳐 죽이고 아라랏 당으로 그들이 도망하매 그 아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왕하 19: 35-37)

다니엘의 ‘메네 메네 데겔우바르신’을 설명하며 바벨론과의 무게가 추에 비해 부족함이 있으므로 장차 나라가 멸망한 것이라 예언했다. 다니엘에게 이 글자를 해독하도록 지혜를 주신 하나님은 유다가 심판을 받기 전에 에스겔에게도 환상을 보여 주셨다. 유다는 성전도 성직자도 종교 관행도 있었다. 오늘날 현대 교회 역시 바벨탑을 쌓아 가고 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라고 말하지만, 이 표현을 가장 많이 접하는 순간은 ‘한 영혼이 아쉬울 때’일 거다. 이렇듯 바벨탑을 쌓는 현대교회에 대한 고민은 19세기에 ‘정통’러시아 정교회를 바라보던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는다.

불후의 걸작이『죄와 벌』이다. 이 작품 속에는 한 인간에게 어떤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페르시아 속 유대인들의 문제가 어렴풋이 느껴진다. ‘에스더’라는 이름은 별을 뜻하는‘astra’에서 유래되었다. 페르시아 종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또 ‘모르드개’가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지은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시기 부모 세대들이 페르시아 사회에 동화되어 가는 흔적으로 볼 수 있다. 에스더는 이런 동화되는 위기의 시대에 유대인 멸절의 위기로부터 벗어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의외의 장면을 보게 된다. 이제 반대로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들을 위기로 내몰았던 민족들을 잔혹하게 몰살하는 장면이 에스더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다인이 칼로 그 모든 대적들을 쳐서 도륙하고 진멸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마음대로 행하고 유다인이 또 도성 수산에서 오백 명을 죽이고 진멸하고(에 9:5-6)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온 이후 우리 사회에서도 기독교는 주도적인 종교가 되었다. 장로 대통령을 배출했고, 조찬기도회는 물론 대통령과 정치인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교회는 적지 않은 입김을 사회에 과시한다.



‘총리 다니엘’과 ‘장로 대통령’의 간극이 우리 사회에서는 그리 멀어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 고위 공직자, 유명 연예인, 인플루언서들 중에 기독교인이 상당수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가 생각하는 ‘좋은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일까? 다정한 남편, 자상한 아빠, 충실한 직장인, 따뜻한 이웃, 신실한 성도 누군가가 이런 평판을 받는다면 좋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런데 실제로 이런 평판을 들었던 사람 중에 독일의 아돌프 아이히만도 있다. 그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나치의 군인으로서 유대인을 학살하는 데 참여했다.

분명 독일은 종교개혁을 일으킨 나라였다. 수많은 유대인을 죽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괴물 같을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지극히 평범하고 좋은 평판을 들은 아돌프 아이히만을 보며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말했다. 우리의 ‘무사유, 무비판, 반지성주의’ 태도가 평범한 현실에서도 괴물같은 악의 실체를 만들 수 있음을 꼬집은 것이다. 종교개혁의 후예들이면서도, 사회의 경제에 안정을 가져다준 히틀러에 열광하던 독일 국민들의 표정은 무척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다.

우리가 다니엘이 되어 하나님나라를 만들어 갈 차례이다. 다니엘을 치열하게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고지를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다니엘의 욕망의 사다리가 아니라 우리가 닮아야 할 표본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할 듯하다. 다니엘 역할을 잘 감당하려고 마음먹으니 아일랜드가 자랑하는 제임스 조이스가 떠오른다고 했다. 아일랜드는 오랜 기간 영국의 식민지였고, 독실한 신앙을 바탕으로 했다는 점에서 우리 민족의 정서와 무척 비슷하다. 두 번째로 큰 도시이며, 베네치아의 세 배나 되는 크기임에도 지금까지 그 어떤 예술가도 이 도시를 세상에 제대로 알리지 않은 것이다.

이런 작가의 작품 배경을 음미해 보면 ‘더블린 사람들’을 ‘서울 사람들’로 바꾸고, 인명과 지명을 한국식으로 바꿔도 큰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서울은 오랜 기간 한반도의 중심 도시였고,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큰 도시들 중 하나이며, 가장 큰 교회 건물이 몰려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기독교의 표준은 언제나 해외로 눈길을 돌리고 있는 현실이 그려진다. 그러면서 우리의 기독교가 ‘마비’의 또 다른 전형은 아닐지 고민이 된다. 역사성을 가진 다니엘을 보면 기독교와 정치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본 회퍼 목사님의 항쟁도 기억나고 자유민주주의와 자유 시장경제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다니엘같은 기독교인들이 침묵하면 안되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어나야 한다는 걸 이 책을 읽고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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