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관계는 말로 되어 있어서 말을 잘 해야 하고 최고의 지성인인 이어령씨는 말로 상대방을 스스로 무릎 꿇게 한다는 얘기가 와닿는다. 말을 잘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서 읽었다. 말만 잘해도 나 자신도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불의는 그냥 넘어가서는 안되는 것 같다. 그것도 말로 잘 반박해야 한다. 아무튼 말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서 최고의 지성인인 저자의 얘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 돈과 칼은 억지로 굴복시키지만 말은 상대방을 스스로 무릎 꿇게 한다” 위기의 사회를 창조의 사회로 재편하는 책이다. 저자 이어령은 1933년 11월 13일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능소 이다.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이화여대 석좌교수, 동아시아 문화도시 조직위원회 위원장 등의 역임했다.
저자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등 여러 신문의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월간 『문학사상』의 주간으로 편집을 이끌었다. 서울 올림픽 개폐회식을 주관했으며 초대 문화부장관을 지냈다. 대표저서로 『지성에서 영성으로』 『의문의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 『흙속에서 저 바람 속에』 『 축소지향의 일본인』 『생명이 자본이다』 『젊음의 탄생』등이 있다.
소설은 『장군의 수염』 『환각의 다리』의 시집『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를 펴냈으며, 희곡과 시나리오 『기적을 파는 백화점』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 『사자의 경주』등을 집필했다. 2021년 한국문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예술 발전 유공자 로 선정되어 금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수백 조의 가치인 숲, 바람, 물, 태양, 생명을 자본주의가 갉아 먹으면서 생산성이 높아졌다고 한다. 오염된 공기나 숲을 회복하면 뭐가 생산성이 높아졌다고 했을까? 인간을 죽이는 가장 무서운 기술이 ‘화생방’ 즉 ‘화’학 독가스, 미‘생’물 바이러스, ‘방’사능이다.
산업기술은 전시 상황에서 인간을 죽이는 기술이 된다. 통조림도 나폴레옹이 전쟁할 때 먹으려고 만들었다. 인터넷을 제일 먼저 쓰기 시작한 것도 미국 육군이었다. 새로운 생명 과학 기술은 인간을 살리는 기술이다.

우리는 지금 미생물을 죽이려고 하지만 선조들은 미생물을 살려 발효식품을 만들었다. 이 세상 집집마다 장독대 있는 나라는 없다. 한국은 집이 아무리 쓰러져가도 반드시 장독대는 있다. 장이란 장은 다 거기서 만들었고 곧 각자의 집에 바이오 공장을 세운 셈이다.
산불이 나면 약육강식으로 유지되던 정글의 법칙이 깨진다고 한다. 큰 동물이든 평소에 쫓고 쫓기던 동물들이 모두 살길을 찾아 한마음으로 한 방향을 향해 뛴다고 한다. 산불의 위기가 역설적으로 한 방향의 길을 찾아주는 순간적인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생물학자들은 또 이런 말도 한다. 발생생물학이나 유전학의 모델 생물로 곧잘 이용되는 단세포 편모충인 클라미도모나스는 암수의 구별이 없이 세포분열로 번식한다. 한 몸이 두 몸으로 갈라지면서 번식을 한다는 말인데, 가령 질소 같은 것이 부족해진다든가 환경이 변하면 둘로 갈라졌던 생체가 다시 하나의 몸뚱이로 합쳐서 위기 상황에 대처한다고 한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그와 똑같은 경우를 무수히 발견했다. 분열하여 서로 싸우다가도 위기에 처하면 서로 손을 잡고 난국을 헤쳐 나가는 길은 백 가지 이론과 서로 손을 잡고 난국을 헤쳐 나가는 모습을 봤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그와 똑같은 경우를 무수히 발견했다. 우리가 지금 위기 상황을 극복하는 길은 백 가지 이론과 천 가지 지식보다 바로 이 정글의 법칙을 깨뜨리는 산불 원리, 분열한 것들이 하나로 결합하는 클라미도모나스의 생식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아이디어를 내도 가져가는 사람이 없다. 스스로가 창조적이지 않아도 티끌만 한 창조를 알아보는 것이 창조 경영이고 창조인 이라는 거다. 창조는 혼자 하는 것이다. 외롭게 혼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창조이다. 창조란 여럿이 하는 게 아니라 혼자 독창적으로 하는 것이다. 결국 창조라는 건 본인이 창조적인 상상력이 없으면 창조적인 사람을 알아줘서 하는 것이다.

창조력도 없고 못 알아보는 사람이 부지런만 해서 사고치고 다니면서 창조력이 없다면 가만히 있는 게 최고다. 창조적인 사람을 내쫓으면 회사가 망한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 사실상 오늘 당장 우리가 넥타이 색깔 하나를 옷과 매치하는 감각이 있으면, 책상에 깔아놓은 색채 하나를 보면 미래의 창조성이 보인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 생명자본주의라는 단어가 거창하게 들리지만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고 현재 진행형이다. 문명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고, 또 경제는 잘사는 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올림픽도 그 동안 북반구에서 치러졌고 남반부에서 치러진 것은 호주 올림픽이 유일했다.
지금 세상은 바뀌어서 인도나 인도네시아가 경이적인 발전을 하고 있다. 이런 얘기를 하면 끝이 없지만, 쓴 걸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아직도 원시적, 비문화적 생명력을 가진 사람이다. 서양 사람들은 쓴 것을 못 먹는다. 문명화된 사람은 쓴 것을 못 먹는다. 그래서 한국 식생활을 보면 한국 문화가 얼마나 원시적, 문화적으로 극과 극이 잘 섞였는지, 세계에서 이런 유례가 없다. 일본과 중국도 나물을 잘 안 먹는다. 한국은 지금까지도 나물을 먹는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채집 문화를 그대로 갖고 있기 때문에 김을 먹고 씀바귀도 그대로 먹는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쑥과 마늘이 나물 문화다. 그 마늘이 아니고 야생 달래마늘이다. 어쨌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온 인간들의 문화적 문명적인 생활소재, 먹는 것의 소재, 요리하는 방법, 디자인하는 방법 등 복잡한 여러 문제를 요약해보면 우리 미래가 보이고 현재가 보인다.
우리 바지 디자인을 보면 세계에 없는 아주 특이한 디자인이다. 서양의 바지는 전부 밀착되어 있는 패션인데 한국바지는 헐렁하다. 유럽에서 말하는 바지는 주로 호복이라고 해서 유목민들에게서 전파된 스커트가 변형된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바지를 접어서 입는다.
서양 옷은 정확하게 한 치, 두 치 재는데, 우리 바지는 정확하게 재지 않는다. 허리통이 굵은 바지를 접어서 입는다. 서양의 의복 디자인은 재단부터 시작한다. 저자의 사례들은 재미있는 것 같다. 창조나 문화는 전부 언어에서 나온다. 기독교의 성경에서는 언어로 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한다.
워드파워는 무기나 돈보다 강력하다. 언어는 도구적 기능이 80퍼센트이고 미적 공감이 20퍼센트이다. 20퍼센트에는 문화와 영혼이 있어서 말속에는 삶과 죽음과 사랑의 자력을 가진다. 나도 일본어를 배우고 싶어서 일본잡지를 보다가 일본의 헤어나 패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일본 패션도 헐렁하게 입는다. 헐렁하면 편하고 부담없이 옷을 입을 수 있을 수 있고 활동력도 생긴다. 언어에서 모든 것들이 확장되고 무브가 일어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