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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같은 시기에는 나라를 정말 사랑하는 윤동주의 시집이 필요할 것 같다. 필사하면서 마음도 가다듬고 시도 읽으면서 머리도 순화하고 싶어서 읽었다. 윤동주는 프랑스시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윤동주 (1917-1945)는 1917년 12월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미니 김용 사이에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명동소학교, 은진 중학교를 거쳐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편입하였으나 신사참배 거부 사건으로 폐교 조치되자, 광명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희 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교토 도시샤 대학영문과로 편입하였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서 연길에서 발행되던 〔카톨릭소년〕에 여러 편의 동시를 발표하고 그 외 조선일보, 경향신문 등에도 시를 발표하였으며, 문예지 「새명동」발간에도 참여하였다.
그의 신변을 염려한 스승과 벗들의 만류로 뜻을 보류했다. 1943년 독립운동을 모의한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2년 형을 선고 받았다. 1945년 2월 16일 광복 여섯 달 앞두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여 고향 용정에 묻혔다. 일체의 생체 실험 주사에 따른 희생으로 추정될 뿐 지금까지도 그의 죽음에 대해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1948년 유고 31편을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고, 1968년에 연세대학교 내에 그의 시비가 세워졌다. 윤동주는 이제 시인이자 명예박사가 되었다. 2025년은 광복 80주년이자 윤동주 시인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을 당하여 서거한지 80년이 되는 해이다. 이에 윤동주가 다녔던 일본 도시샤 대학에서는 ‘죽은 사람에 대한 명예학위 증정’이라는 예외 규정까지 만들어 학장단 회의에서 열여섯 명 전원 찬성으로 서거일인 2월16일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기로 했다.
고하라 가쓰히로 도시샤대학 총장은 우리는 자유를 탄압하는 군부에서 윤동주를 지켜내지 못한 분함이 있다고 했다. 윤동주 시인은 80주년 아니더라도 한국, 일본, 중국은 물론 미국, 유럽과 전 세계의 수많은 단체에서 추모하는 세계적 시인이 되었다. 손은 뇌가 내리는 명령을 수행하는 운동가일 뿐 아니라 뇌에 가장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감각기관이기 때문에 손을 많이 사용하면 할수록 전두엽에 가해지는 자극이 커지고 그 과정에서 두뇌의 중추인 전두엽은 자극을 해석하는 것을 넘어서 창의적 활동을 한다.
필사하면 윤동주 시인을 빼놓을 수 없다. 윤동주는 자신이 좋아 하는 시인 백석의 시집⎾사슴⌋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구하려 했지만 구할 수 없어 시집 전체를 필사해서 읽으면서 문해력을 키우고 사상을 떠올렸다고 한다. 이 시집의 표기는 가능한 현대어 표기법을 따르면서 읽기에 지장이 없는 한 당시의 표기법 그대로 원문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고자 했다. ‘얼골/ 얼굴’ ‘코쓰모쓰/ 코스모스’ 등 발간 연도에 따라서 발간된 대로 표기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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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서시’라는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다. 회장을 지낸 이근배 시인은 서시 제목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되돌려야 한다고 하면서 윤동주는 서시를 쓴 적이 없다고 한다. 윤동주 시인의 시는 100% 육필 원고가 남아있는데 서시라는 말은 육필원고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다.
시의 내용에도 하늘, 바람, 별은 나오지만 서시는 어디에도 없어서 지금이라도 제목을 윤동주가 쓴 대로 다시 바꿔야 한다. 이 시는 윤동주의 시 세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시로 자유와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를 담겨있다. 또한 이 시는 이바리기 노리코 시인에 의해 일본의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지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자화상은 자기가 그린 초상을 말한다. 동주는 자신의 모습을 자화상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썼다. 연희 전문학교 재학 때 쓴 시로 일제 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의 현실 속에서 부끄럽게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쳐 보듯, 우물을 들여다보는 행위를 통해 자아 성찰의 상징적 공간으로 활용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형상화하고 있다.
돌아와 보는 밤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 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 불을 켜두는 것은 너무나 피로롭은 일이옵니다. 그것은 낮의 연장이 옵기에-
이제 창을 열어 공기를 바꾸어 들여야 할 텐데 밖을 가만히 내다 보아야 방안과 같이 어두워 꼭 세상 같은데 비를 맞고 오던 길이 그대로 비속에 젖어 있아옵니다.
하루의 울분을 씻을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사상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
일제의 기혹한 탄압으로 어수선하고 엄혹한 바깥세상에서 돌아와, 호젓한 방안에서 불을 그고 어둠과 대면하는 윤동주 시인의 내면의 세계가 훤히 보인다. 따라서 밤은 구원의 공간이고 해방감이 깃든 위안의 보금자리다. 희망을 가져 봐도 현실은 어둡고 암울하여 출구 없는 열정 가슴속 깊은 곳에 삭이는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태초의 아침
봄날 아침도 아니고
봄, 가을, 겨울,
그런 날 아침도 아닌 아침에
빨-간 꽃이 피어났네,
햇빛이 푸른데,
그 전날 밤에
그 전날 밤에
모든 것이 마련되었네,
사랑은 뱀과 함께
독은 어린 꽃과 함께
‘봄날 아침도 아니고 여름, 가을, 겨울, 그런 날 아침도 아닌 아침에, 로 시작되는 이 시는 성경의 창세기를 근간으로 했다. 아침에 피어나는 빨간 꽃과 그에 담긴 독이라는 상반된 이미지를 통해 삶에 대한 아름다움과 위험과 갈등이 내제된 시로 모순적인 진실이 날카롭게 묘사되어 있다. ‘사랑은 뱀과 함께/ 독은 어린 꽃과 함께’ 이 마지막 구절에서 시인은 삶의 본질을 얼마나 무섭게 꿰뚫어 보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또 태초의 아침
하얗게 눈이 덮이었고
전신주가 잉잉 울어
하나님 말씀이 들려온다.
무슨 계실일까
빨리 봄이
죄를 짓고
눈이
밝어
이브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런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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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 또한 창세기를 모티브로 같은 날 쓴 시다. 따라서 태초의 아침의 완성편이나 다름없다. 하얗게 눈 덮인 풍경을 상상하면서 태초의 순간을 떠올려 보고 새로운 내일을 준비해야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새벽이 올 때 까지
다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검은 옷을 입히시오
다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흰 옷을 입히시오
그리고 한 침대에
가즈런이 잠을 재우시오
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이시고
이제 새벽이 오면
나팔소리 들려올 게외다.
이 시는 삶과 죽음의 경제를 고요한 새벽으로 묘사했다. 인간의 삶과 죽음은 하나의 순환 속에서 이루어지고 죽음을 맞이한 사람과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검은 옷과 흰옷을 입힌 모습으로 구분하면서도 결국에는 같은 침대에서 쉬게 된다는 것이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다.
팔복
- 마태복음 5장 3-12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이 시는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성경에 나오는 구절을 반복함으로 하나님의 복을 간절히 바라지만, 마지막 행에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 이오’라고 하면서 희망적이 기대를 버리고 일제 치하가 계속되는 현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윤동주의 시는 읽을 때마다 마음이 정화되고 애국심이 생기고 가슴이 잠잠해진다. 필사하면 그런 마음이 더 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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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