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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민님의 서재
  • 장 보드리야르
  • 폴 헤가티
  • 17,100원 (10%950)
  • 2024-04-30
  • : 469
정신분석의 전문용어와 주장들은 크게 의심받지 않고 사용되지만 보드리야르는 무의식이, 아마도 결여와 죽음 때문에, 결여와 죽음을 중심으로 구조화된다는 관념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상징의 자리를 대신 꿰찬 것은 이 현실에 관한 후자의 형식이었으며, 현실은 ‘상징적인 것의 시뮬라크럼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니다‘.
상징적인 것은 개념도, 행위자도, 범주도, ‘구조‘도 아니라, 교환의 행위이자 실재를 종결시키는 사회적 관계이며, 이는 실제를 해소하고 동시에 실재와 상상적인 것 사이의 대립을 종결 시킨다.
상징적 교환의 세계가 더 현실처럼 보임에도 진실은 모호성, 죽음, 희생 폭력에서 발견할 수 있다. 더구나 보통의 현실처럼 여기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사라졌으며 그래서 실제 현실 대신에 우리는 자신을 현실로 제시하는 다양한 유형의 시뮬라크르를 얻는다. 시뮬라크르가 더욱 완전해질수록 우리는 실재에 대한 감각을 더 갖게 된다. 따라서 실재는 상징적 교환과 시뮬라시옹의 중간항이지만 시뮬라크르의 산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보드리야르가 세계에 대한 지각 또는 ‘경험‘의 지배적 양식으로 간주하게 된 시뮬라시옹에 대한 첫 번째 분석은 <상징적 교환>에서 나타난다.
시뮬라시옹이 순수하게 사회적/역사적 수준(즉 실재의 단계)에 놓인다면, 보드리야르는 시뮬라시옹 이론이 작동하도록 허용하기에는 지나치게 단순하고 문제적인 역사의 한 버전을 갖게 된다.
그런다음 우리는 직접(적인) 질문에 대해 시뮬라시옹되지 않은 응답을 얻는 것에 대한 불가능성을 보게 된다.
모델과 코드는 배제와 관련 있는 것이 아닌(상징적 교환 관련해서는 제외), 선동incitement과 가깝다.
<상징적 교환>에서 보드리야르는 시뮬라시옹에서 마침내 완전해지는 (이전까지는 감춰지거나 부정되거나, 아니면 흡수되었기에) 죽음의 배제에 대해 서술하며, 특히 <악의 투명성>에서 그것을 어떤 악의 존재든지 부정하려는 시도로 확장시킨다.
체제는 선을 ‘위해’ 살지 않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환영이기에, 우리가 속한 싸움은 실재와 환영의 싸움이 아니라 서로 다른 환영끼리의 싸움이라고 보드리야르는 시사한다”
마찬가지로 진부할지언정 더욱 평범한 차원에서는, 개인이 스스로를 항상 ‘다른 존재’로 바꾸고자 할 때 그 사람의 내면에서 불가능한 교환이 이루어진다.
결국 내가 나 자신의 생명을 교환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갈 곳이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주체의 세계 너머에는 객체의 반응이나 현실 그 자체가 존재한다. 그것이 지식과 가시성에서 소비되기에, 그것은 수동성을 버리고 관찰자들을 속이기 시작한다
가장된 세계에서 시뮬라시옹 이외에는 무엇이 있을지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모든 개념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교환은 긍정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며, 결코 탈출구가 아니다. 선은 언제나 ‘체제’의 편이다: 모호한 것만이, 어떤 의미에서는 악만이,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로, 세계로 데려다줄 수 있다. 그 곳에 도달해봤자 또 다른 ‘허위’로 돌아올 뿐이며(시뮬라시옹의 형태를 택할지, 환영의 형태를 택할지의 문제), 그 과정은 폭력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을 안다면 유용할 테고, 어떤 면에서는 과도 현실적 세계 내의 나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우리가 그 세계를 통제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러한 이원적인 형태가 시사하는 것은 사건이 일어나는게 허용되는 근본적 정적주의quietism이니 말이다.
DNA는 시뮬라시옹된 사회를 작성하는 ‘코드’의 생물학적 실현이며, 그것이 발견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무의식이 근대성에 속하듯, DNA는 포스트모더니티, 즉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해석방법이다.
매트릭스The Matrix가 전체 인류를 보존하여 꿈을 꾸게 하고 그들을 배터리로 이용할 때, 그것은 우리가 실제로 그러한 존재 방식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무시한다.
사진의 향수는 보인 객체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그것이 가진 적 없는 현실에 대한 향수이며, 그 현실은 그것이 이미지의 형태로 유지됨으로써 더욱 제거된다. 바르트가 ‘푼크툼’을 죽음과 부재 주위에 모여 바라보는 주체와 이미지인 객체 간의 상호작용의 공간이라고 정의한 바에 대해 보드리야르는 어느 정도 흥미를 보였는데, 그것은 특정한 무언가도 누군가도 아니고, 놓쳐야 할 죽음조차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것, 즉 세계이다.
니체는 시뮬라시옹의 개념들을 미리 ‘예측’했으며 특히 <우상의 황혼>과 <권력에의 의지>에서 그것을 잘 보여준다.
‘표면의 세계와 진정한 세계의 대조는 “세계”와 “무nothing”의 대조로 환원되며’ ‘우리는 표면 세계로부터 진실을 구별할 수 있는 그 어떠한 범주도 가지고 있지 않다’
‘시뮬라크르의 질서’는 <사물의 질서>의 스타일로 시대구분을 재현하고, 세계에 대한 묘사가 아닌 효과적으로 세계를 만드는 것으로서 푸코의 ‘담론’의 중심성centrality 개념은 어떻게 다른 시뮬라크르에 의해 지배된 시대가 시뮬라시옹된 것 외부에 어떠한 현실도 갖지 못하는 가를 보여줄 수 있다.
엘리아스 카네티
‘우리는 너무 많은 것에서 왔다. 우리는 너무 적은 것을 향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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