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판사 홍보 활동의 일환으로 작성했기에, 주관적인 내용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볼 것입니다."(<신약성경>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13.9~12)
"600년의 시차는 인간 본성 가운데 무엇이 중요한지 뚜렷이 드러내 주었다. 중세 사람들은 현재 우리의 정신적, 도덕적, 물리적 상황과 무척이나 다르다 못해 심지어 낯선 문명에 버금가는 상황하에 존재했다. 그 결과 이처럼 낯선 환경 속에서 우리가 친숙하다고 인식하는 행위의 성질은 인간 본성에 영구한 것으로 밝혀진다. 만약 역사에서 교훈을 요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교훈은 바로 여기 있는 것이다."(본서 p.38)
19세기를 기점으로 역사가 단독 학문으로 분화하게 되면서 역사 서술은 두 방향으로 갈라진다. 그 이전까지 역사 서술은 독자에게 교훈을 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쓰여졌다. 그러나 역사가 "있었던 그대로의 역사"를 탐구하는 영역으로 분화하면서 과거의 안개를 걷어내는 역사"학자"와, 네러티브를 통해 독자를 상대로 역사를 쓰는 역사"가"로 분화했다. 바바라 터크먼은 명백히 후자에 속하는 인물이다. 문제는 네러티브를 통해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냐는 것인데, 그녀의 문제의식은 역사라는 거울을 통해 변하지 않는 인간(우리 자신이기도 하다)의 속성을 이해하고 교훈을 얻는 것이었다.
많은 저작을 남겼지만, 이 책에서 터크먼은 여타 저작들과는 다른 시도를 하고 있다. 특정 사건이나 소재(ex: 1차 세계대전, 지도자들의 어리석음)가 아닌, 중세가 저무는 14세기를 소재로 삼아 인간의 모습을 거울처럼 보여주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본서의 주제인 14세기는 중세의 저물녘인, 가을(autumn)이라고 할 수 있는 시기였다. 동시에 소빙하기로 인한 자연재해와 전염병, 전쟁(백년전쟁)이 유럽을 휩쓸었다. 요한 하위징아는 『중세의 가을』에서 이 시기 사람들의 망탈리테를 복원하면서, 보편적인 정서와 방향 감각이 중세적인 가운데 서서히 르네상스의 기운이 태동하고 있음을 문화사적으로 서술했다. 덕분에 중세와 인문주의의 공존이라는, 일견 모순된 공존으로 보이는 내용을 규명한 덕에 지금까지도 문화사 연구서에서는 수작으로 남아있지만, 터크먼은 이런 모순이 당연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서술을 풀어가고 있다.
"문제가 더 복잡해지는 까닭은 중세 사회가 쾌락을 금하면서도 실제로는 단념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사실은 교회 자체도 그에 못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시도했으며, 일부는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인류 대부분은 금욕을 위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었다. 역사상 금전과 소유에 대해서라면 14세기보다 더 많은 관심을 쏟은 시대가 또 없었으며, 이른바 육(肉)에 대한 관심은 여느 시대와 다르지 않았다. 다시 말해 경제적 인간(economic man)과 관능적 인간(sensual man)은 억압할 수가 없었다."(본서 p.46~47)
"12세기와 13세기 동안 정치 권력이 중앙화되는 사이 유럽의 정력과 재능은 문명 발전의 커다란 폭발 가운데 하나에 모이고 있었다. 상업에 의해 자극을 받아 예술, 기술, 건축, 학문, 육지와 바다 탐험, 대학, 도시, 금융과 신용 거래를 비롯해서, 삶을 풍부하게 만들고 지평을 넓혀주는 모든 영역에서 급상승이 일어났다."(본서 p.64)
14세기의 혼란에는 자연적인 요소도 있었지만, 그 이전 체제의 한계와 결과물이 동시에 표출된 결과였다. 상업이 발달하고 교역이 점차 늘어나면서 부가 축적되었고, 중세 체제를 지탱하는 기독교의 논리는 인간의 욕구를 완전히 제어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 절대적인 진리이자 신앙의 주관자, 동시에 세속 군주의 속성을 다 가지고 있던 교황은 둘이 되었고, 세속의 혼란을 두 배로 만드는데(?) 기여했다. 새로운 질서는 중앙에서 현실의 권력을 키워온 국가-특히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대신했는데, 지방의 귀족 단위로 자기 논리가 살아있는 상태로 국가를 얽어나가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기후변화, 전염병, 이전 시대의 한계와 현실의 이해관계 충돌의 장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냐는 것이 터크먼이 역사라는 "먼 거울"을 통해 비추는 인간의 모습이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서 인간은 정답만을 따라가는 현명한 존재가 아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답을 따라가는 존재이다. 그러다보니 자기 논리에 빠져 혼란을 더하기도 하고(교황을 필두로 한 종교계 및 국가 지도자들), 과거의 영광과 가치관을 따라가다 몰락/파멸하기도 한다.(기사 및 귀족들) 그러나 전염병, 전쟁, 교회 대립 같은 무질서의 대리인이 자리한 와중에 비록 폭력적이고, 파괴적이고, 탐욕스럽고, 오류투성이일지라도 인간은 질서에 대한 나름의 상상을 유지하며 방향을 모색했고, 그 결과 느슨한 국가가 행정력/조직력을 갖추고 자리를 잡으면서 질서의 원리가 나타났다. 당대인들은 어렴풋이 알거나 몰랐겠지만 서서히 혼란이 종식되면서 유럽 세계는 다음 시대로 넘어가고 있었다.
터크먼은 쿠시의 영주 가문을 첫 고리 삼아 중세의 마지막 모습과 그 가운데에서 인간이 보여주는 모습들을 엮어내고 있다. 소재 자체가 지닌 다양성(내지는 모순성), 그리고 시대적 포괄성 때문에 저자 특유의 명료한 서술이 덜해 보이지만, 문제의식과 통찰력은 뒤지지 않는 수작이라고 여긴다.
600년의 시차는 인간 본성 가운데 무엇이 중요한지 뚜렷이 드러내 주었다. 중세 사람들은 현재 우리의 정신적, 도덕적, 물리적 상황과 무척이나 다르다 못해 심지어 낯선 문명에 버금가는 상황하에 존재했다. 그 결과 이처럼 낯선 환경 속에서 우리가 친숙하다고 인식하는 행위의 성질은 인간 본성에 영구한 것으로 밝혀진다. 만약 역사에서 교훈을 요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교훈은 바로 여기 있는 것이다.- P38
문제가 더 복잡해지는 까닭은 중세 사회가 쾌락을 금하면서도 실제로는 단념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사실은 교회 자체도 그에 못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시도했으며, 일부는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인류 대부분은 금욕을 위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었다. 역사상 금전과 소유에 대해서라면 14세기보다 더 많은 관심을 쏟은 시대가 또 없었으며, 이른바 육(肉)에 대한 관심은 여느 시대와 다르지 않았다. 다시 말해 경제적 인간(economic man)과 관능적 인간(sensual man)은 억압할 수가 없었다.- P46
12세기와 13세기 동안 정치 권력이 중앙화되는 사이 유럽의 정력과 재능은 문명 발전의 커다란 폭발 가운데 하나에 모이고 있었다. 상업에 의해 자극을 받아 예술, 기술, 건축, 학문, 육지와 바다 탐험, 대학, 도시, 금융과 신용 거래를 비롯해서, 삶을 풍부하게 만들고 지평을 넓혀주는 모든 영역에서 급상승이 일어났다.- P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