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Redman님의 서재
  • 오뒷세이아
  • 호메로스
  • 22,500원 (10%↓1,250)
  • 2026-08-10
  • : 80,675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의 새로운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이로써 천병희, 김기영, 이준석에 이어 네 번째 원전 완역본이 출간된 것이다. 누군가는 어떤 번역이 가장 좋고 추천할 만한지 궁금해할 수 있다.

​

번역자는 원전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이에 따라 독자를 원전에게로 움직이든지 아니면 저자를 독자에게로 움직이게 한다. 이를 현대 번역 연구의 용어로 표현하면, 번역은 이국화(foreignizing)와 자국화(domesticating)의 혼합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번역자가 텍스트를 어떻게 정의하고, 어떠한 전략을 구사하는지를 중심으로 책을 읽을 수 있다.

​

이 관점에서 김헌의 번역본에서 눈에 띄는 것은, 약 3천년 전 텍스트의 '낯섦'을 강조하는 방식을 택했다는 것이다. 역자에 따르면, 호메로스 시대 "인간관은 지금 여기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나는 그 특이성을 일단 횡격막에 주목하여 설명하고 번역하였다." 호메로스 시대에 인간은 횡격막으로 사고하고 감정을 느낀다고 생각했다. 횡격막은 "감정과 사고, 판단과 숙고, 그리고 관심과 배려, 호감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기능한다." 역자는 횡격막 등 표현에서 드러나는 특이성뿐만 아니라 이 서사시의 형식적 측면까지 최대한 살리고자 원문의 어순을 따르는 방식으로 번역했다.

​

한 대목을 비교해보자. 페넬로페가 오뒷세우스를 알아보는 장면이다.

​

"그가 이렇게 말하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무릎과 심장이 풀렸으니

오뒷세우스가 말한 확실한 특징을 그녀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울면서 오뒷세우스에게 곧장 달려가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고는 머리에 입 맞추며 말했다." (23.205-8, 천병희 역)

​

"이렇게 말하자, 거기서 풀렸다, 그녀의 무릎과 소중한 심장이,

오뒷세우스가 그녀에게 여실히 보여준 징표를 알아챘기에.

눈물을 흘리더니 곧이어 그대로 달려가, 양손으로

오뒷세우스의 목을 감쌌고, 머리에 입을 맞추고 말을 건넸다." (23.205-8. 김헌 역)

​

김헌의 번역은 '거기서 풀렸다'를 원문처럼 문장의 앞에 배치해두어 문장이 다소 읽기 어렵게 되었다. 이처럼 횡격막 등의 낯선 표현, 한국어와 다른 어순 배치 등으로 인해 이 번역본은 다른 번역본과 비교했을 때 읽기 힘든 것이 사실이며, 내용이 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호메로스를 처음 읽는다면, 이 번역본보다는 다른 번역본을 먼저 읽고, 김헌의 번역을 통해 보다 원전에 가까운 독서를 경험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낯섦은 언제나 우리의 사유를 자극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

역자는 호메로스 서사시의 낯섦뿐만 아니라 그 이야기가 가진 보편성도 강조한다. 역자에 따르면, "<오뒷세이아>는 이름을 잃은 '남자'가 자기의 이름 '오뒷세우스'를 되찾아 가는 이야기다. 그리고 자기 이름을 감추고, 개성을 지우며,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잃어버리고 다시 찾지 못한 채 표류하고 방황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는 이 서사시 첫 10행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호메로스는 '남자'의 이야기로 이 서사시를 정의했으며, 다시 '곡절이 많은'으로 이 사내에 대해 규정한다. <오뒷세이아>는 어떻게 보자면 불특정의 '그 사람'이 많은 곡절을 통해 특정의 누군가, 즉 '오뒷세우스'가 되어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

이 서사시의 줄거리는 오뒷세우스가 10년 동안 산전수전 다 겪으며 집으로 귀향하는 이야기지만, 이것만으로는 작품 전체를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중요한 것은 귀향의 의미다. 오뒷세우스의 귀향은 영혼의 자기 정체성을 위한 편력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질문은, 오뒷세우스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이다. 오뒷세우스는 알케노오스 왕, 텔레마코스, 페넬로페에게서 이 질문을 받았고, 자신이 무엇을 겪었는지를 말한다. 그는 자신의 겪음을 얘기함으로써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혔던 것이다. 오뒷세우스에게서 고통은 자기 정체성의 일부였다.

​

고통을 자기의 정체성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오뒷세우스는 신적 존재로서 편안히 살아가자는 칼륍소의 제안을 거부하며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

"그러나 나는 그렇게 원하고 갈망합니다, 모든 날마다

집으로 돌아가기를, 그리고 귀향의 날을 볼 수 있기를.

설령 신 중에 누가 다시 포도주빛 바다에서 난파시켜도

참을 겁니다, 가슴 속에 참아내는 기개를 지녔으니.

이미 나는 많은 일들을 겪었고 많은 고생도 했으니까,

파도와 전쟁으로. 여기 이것도 그것들에 더하라지요."

(5.219-24행)

​

칼륍소를 떠난 이후로도 오뒷세우스는 산전수전 다 겪고 나서야 고향에 도착한다. 자신의 집에서 자신의 가족을 괴롭히고 재산을 축내는 구혼자 무리를 모두 무찌르고 페넬로페와 만나면서, 올 것 같지 않았던 귀향도 드디어 완결된다. 하지만 그의 겪음은 끝나지 않았다. “여자여, 결코 우리가 모든 시합의 끝에 이른 것은 아니라오 아직도 측량 못할 고생이 이후에도 있을 거요.” (23.248-49) 이는 다르게 말해 고통은 인간의 조건이기에 인간으로 살아갈 동안에는 고난이 끝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즉 겪음은 끝이 없다.

​

<오뒷세이아>의 모험은 인간의 조건과 정체성을 확인하는 여정임과 동시에 고난의 여정이었다. 낯선 곳으로 가게 될 때, 또는 불확실한 상황을 마주치게 되었을 때 누구나 그것을 피하고 싶어하지만, 오뒷세우스는 그러지 않았고, 당당히 그 불확실한 여정을 받아들여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았다. ‘오뒷세우스적 인간’을 말할 수 있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똑바로 마주하여 겪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