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태생의 경제사학자 조엘 모키르는 예일 대학교 경제학과에서 '저지대 국가들의 산업 성장과 스태그네이션, 1800-1850'이라는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으며, 이후에도 경제사가로서 산업혁명, 유용한 지식(useful knowledge)이 유럽의 경제 성장에 미친 영향을 등을 연구해왔다. <성장의 문화>는 그러한 모키르의 문제의식과 관심사를 보여주는 제목이다.
에코리브르는 이 책을 유럽과 중국의 경제적 격차를 주로 설명하는 책인 것처럼 홍보한다. 실제로 이 책의 제 5부 '동서양의 문화 변화'는 중국과 유럽의 서로 다른 문화적 기반이 경제적 차이로 이어졌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지만, 이 내용은 전체 17개의 장에서 단 두 개의 장만을 차지하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모키르는 <성장의 문화> '감사의 글'에서 저작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현대 경제학은 역사와 세상을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 지난 50여 년 동안 경제학의 경계선 밖에 있던 문화와 제도라는 개념을 받아들였다. 이 책에서 나는 콜럼버스의 항해부터 뉴턴의 <프린키피아> 출간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문화와 제도를 면밀하게 분석하면서, 이런 변화가 근대적 경제 성장의 조건을 어떻게, 그리고 왜 조성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p. 9)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모키르의 관심사는 중국과 유럽의 대분기라기보다는, 문화와 경제의 관계라는 훨씬 더 크고 복잡한 주제를 다루려 하고 있다.
모키르는 문화를 "유전적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전달되며 사회의 다른 구성원이 공유하면서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신념, 가치, 선호의 집합체"로 정의한다. 이때 신념은 우리가 사는 환경을 포함하여 사회적 관계나 세계에 대한 실증적 명제를 가리키는데, 신념에는 성문화된 지식과 암묵적 지식, 대인관계와 능력도 포함된다. 가치는 사회와 사회적 관계에 대한 규범적 명제이며, 선호는 개인적 사정에 대한 규범적 명제이다. 문화는 제도의 토대를 놓는다. 특정 집단의 제도는, 그 집단에서 용인되는 문화 위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모키르는 경제 제도를 묻는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그 경제 제도를 가능케 하는 문화적 요소를 묻고 있는 것이다(실제로 "The Institutional Origins of the Industrial Revolution"라는 에세이에서도 모키르는 18세기 기술 발전을 촉진한 문화를 중요하게 거론하고 있다) <성장의 문화>는 이처럼 경제와 문화를 핵심 축으로 삼아 경제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링크: https://share.google/aBFg7tfdvSUwAIYR2
책은 총 다섯 부분으로 나뉘는데,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된 1부는 유럽에서의 경제발전을 설명하기 위한 문화에 대한 이론적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이후의 논의는 1부의 이론을 바탕으로 전개되므로 이 책을 읽는다면 1부만 읽어도 무방하다. 2부와 3부는 17세기 유럽에서 정초된 '성장의 문화'를 다루고 있다. 2부는 프랜시스 베이컨과 아이작 뉴턴 등 소수의 창조적 개인에 의해 혁신적 생각들이 파생되어 현장으로 전파되었다고 주장하며, 3부는 포커스를 넓혀 문예공화국(국역본에는 편지공화국이라고 번역되었지만, republic of letters에서 letters는 편지가 아니라 문예나 문필 정도의 의미이다)으로 대변되는 유럽의 자유로운 경쟁과 다원주의적 문화 속에서 '유용한 지식'이 차근차근 다듬어지는 양상을 서술한다. 4부는 "장인의 독창성"과 "과학적 방법 및 발견"을 통합한 계몽주의가 경제성장과 기술발전의 원동력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산업계몽주의'는 진보에 대한 신념, 실용기술의 발전을 중시하는 문화, 그리고 실용기술과 같은 유용한 지식이 진보를 이룰 수 있다는 관념을 고조함으로써 끊임없이 새로운 생산기술을 향상시키는 문화를 만들어놓았으며, 이것이 산업혁명의 문화적 토대를 정초했다. 사실상 결론에 가까운 4부가 지난 뒤에야 모키르는 5부에서 중국의 사례를 꺼내어 유럽의 경우와 비교한다.
당연히 모키르의 책은 훨씬 더 많은 논점들로 가득 차 있으며, 저자는 다양한 요소를 함께 고려함으로써 자신의 논의가 단순화되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모키르가 성취한 업적이 있다면, 경제학의 용어로 슘페터적 성장, 즉 기술발전에 따른 경제성장을 역사적 지평으로 끌어와 문명 발달을 설명하는 기제로 보편화했다는 것이다. 이는 아제몰루나 포메란츠의 모델과 구분되는, 정신문화와 문명/경제 사이의 관계를 다시 설정하려는 야심찬 시도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역사학의 관점, 특히 근대 초기 서양 지성사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볼 때, 이 책은 여러모로 미묘한 인상을 준다. 우선 이론적 차원에서, 제2부에서 제시된 ― 소수의 창의적 학자와 기술자로 구성된 엘리트 집단으로부터 지식이 다수에게 전파된다는 ―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모키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부분의 문화적 사업가는 개인적으로 문화의 선택지에 미미한 변화만을 초래하지만, 그중 일부는 문화의 선택지에 눈에 띄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요컨대 그들은 사회의 신념, 가치, 그리고 선호를 바꾸어놓았다.”(102) 모키르가 말하는 ‘문화적 사업가’란 서로 다른 신념을 조정하고 지배적인 기성문화에 도전하며, 결국 다수에게 새로운 문화적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문화를 변화시키는 인물들이다. 그는 이러한 문화적 사업가들의 활동을 통해 혁신이 전파된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문화가 일대다(一對多)의 방향으로 전달된다는, 곧 소수 엘리트로부터 다수에게로의 전파라는 전제에 의존한다. 이는 모키르가 아무리 논증하려 해도 입증하기 어려운 일종의 신념에 가깝다. 만약 문화와 신념의 변화를 소수의 천재적 인물들이 미친 영향의 확산으로 이해한다면, 수용자들 — 곧 그 아이디어를 받아들인 다수 — 는 어떠한 이유로, 어떤 사회적·지적 맥락 속에서 엘리트의 대안을 수용하게 되었는가? 또한 엘리트들이 문화적 대안을 제시할 때, 그들의 의도는 기존 권위에 맞서는 대안적 비전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었는가, 아니면 애초에 권위에 대한 저항이나 설득 자체에 관심이 있기는 했는가? 모키르의 서술만 놓고 보면, 마치 몇몇 영웅적 인물들이 창조적 아이디어를 제시함으로써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러한 서사는 역사적 현실을 지나치게 평면화하고, 결과적으로 목적론적 해석으로 기울 위험이 크다. (그런 점에서 모키르가 문화적 사업가의 예시로 드는 아이작 뉴턴은 본인의 의도와 다르게 후대 엘리트 문화에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p. 152)
모키르가 제시하는 역사적 설명도 재고할 여지가 많다. 몇 가지 사례만 들어보겠다.
"베이컨과 그의 추종자들은 오늘날 산업계몽주의라고 알려진 현상의 씨앗을 뿌렸으며"(128) 이는 다소 비약이 있는 과장된 진술이다.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를 살다간 베이컨과 18세기의 계몽주의 사이에는 너무나 긴 시간적 장벽이 있고, 사상적으로도 과학에 대한 계몽주의의 태도는 베이컨으로만 소급될 수 없는 여러 요소들이 존재한다.
"보수적인 반동 세력은 반종교 개혁 시기에 다시 힘을 모았고, 예수회는 남유럽과 라틴아메리카에서 새로운 과학 혁신의 확산과 계몽주의의 발생을 늦췄다. 영국의 토마스 홉스와 프랑스의 보쉬에 같은 영향력 있는 보수적 사상가들은 필사적으로 지적 혁신과 싸웠다."(236) 홉스와 보쉬에를 보수적 사상가로 낙인찍는 근거는 제시되지 않고 그저 선언되고 있다. 나는 이렇게 반동/진보를 선험적으로 정의하여 과거의 논쟁 구도를 구획하는 것보다 실제 논적으로 삼았던 대상, 그 이유, 실제로 오갔던 논쟁이 무엇이었는지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더 재미있고 시사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진보 관념은 계몽주의 유럽의 특징이었으며, 유럽이라는 혁신 창출 기계에 문화적 윤활유가 되었다. 하지만 진보는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냐 한다는 믿음이 있더라도 반드시 그럴 거라고는 보장하지 못한다...이미 확립된 기존의 지식 체계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지대를 추구했던 사람들은 새로운 과학을 강력하게 반대했다."(344-346) 얼마 전 내가 번역해서 올린 드미트리 레비틴의 서평만 읽어도, 모키르가 얼마나 낡은 도식을 반복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모키르의 책은 중요한 물음을 담고 있다. 모키르는 경제성장에서 문화의 차이 대신 지리적 요인을 중시하는 케네스 포메란츠와 캘리포니아학파류의 설명을 배척하고, 문화와 경제 사이의 관계라는 큰 주제에 대해 야심찬 대답을 시도하려 한다. 문화를 사회에서 공유하는 신념, 가치, 선호의 총체로 보는 모키르의 정의도 수용할 만하다. 그러나 이러한 재료들을 통해 모키르가 내놓은 답변이 과연 그 질문의 무게를 얼마만큼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더 읽어볼 책
로버트 앨런 <세계경제사>
케네스 포메란츠, <대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