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식의 <무교>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서 깊숙하게 박혀 있는 무교를 '한국인의 근본 종교'로 복권하고자 한다. 무당은 "이상한 귀신을 섬기는 한참 덜떨어진 기괴한 인간"이 아니며 무교는 단순히 점을 봐주거나 귀신을 쫓아내는 의식이 아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저자가 구사하는 전략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저자는 '무교'가 미신적인 무속(巫俗)이 아니라 그리스도교나 불교와 같은 나름의 체계를 갖춘 '종교'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무교는 어떠한 의미에서 종교인가? 무교에는 신(신령)과 인간(신도) 사이를 매개하는 무당이라는 사제가 있다. 신령, 무당, 신도의 세 요소는 굿이라는 무교의 고유한 의례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구조에서 무교는 신도가 무당이라는 특수한 사제 계급의 중개로 신령을 만나 도움받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무당은 신도가 신령과 교통하기 위해 중개자로서, 그리스도교의 사제에 해당한다. 즉, 저자의 논리에 따르면 무교는 그리스도교나 불교와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기에 종교인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역설적이게도, 한국 고유의 정신인 무교가 서양의 종교와 유사하기 때문에 미신이 아니라는 논리를 펼치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서도 둘째로, 저자는 무교를 미신으로 취급하는 '우월한' 고등종교인 그리스도교와 불교 역시 '저열한' 미신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음을 밝힘으로써 무교나 그리스도교나 "종교 신앙은 일반적으로 다 같다"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이는 무교, 그리스도교, 불교의 신앙 구조가 동일하기 때문이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신의 성격도 동일하기 때문이다. 대승불교는 보살이라는 허구적 존재를 신봉하며 그것에게 자신의 문제 해결이나 복을 빈다. 이는 신적 존재에 의존하지 말고 이성적 가르침에 의거하며 살아가라는 붓다의 본래 정신에 근본적으로 어긋나는 신앙이다. 저자가 더 가혹하게 비판하는 그리스도교 역시 증명되지 못하는 신을 믿으며, 내용의 진리값이 확실치도 않은 성서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 불교나 그리스도교 역시 "신도들이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허구의 존재"를 믿는다면, 동일한 이유로 무교만이 미신 취급 당하는 것은 부당하다. 논리를 이렇게 가져가면, 차라리 무교(無敎)가 가장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어쨌든 저자는 이러한 주장으로 무교(巫敎)를 옹호한다.
그렇다면 무교가 미신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무교는 늘 권력의 중심에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유교나 불교는 권력에 습합해 있었기 때문에 '미신'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있었다. 권력의 논리에 의해 진리와 비진리의 문제가 결정되었고, 본래 한국인의 보편 신앙이었던 무교는 외래 종교인 유교와 불교에 의해 점점 밀려나게 되었다. 무교는 한국인의 정신적인 뿌리였으며 현대에도 성행하고 있지만, 늘 권력에 밀려 미신으로 폄하받았다. 고려 때부터 조정은 서서히 무당을 탄압하더니 조선 시대에는 본격적인 탄압 방안이 강구되었다. 식민지 정부와 박정희 정권도 대대적인 무당 탄압 정책을 펼쳤다. 무교가 힘을 쓰지 못했던 이유는, 저자가 정확하게 지적하듯이 "무교는 '어떤 중심 교리를 믿는다'와 같은 확실한 교리 체계"가 없으며 무당과 신도 사이에 잘 조직된 중앙집권적 체제 같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무교는 더 밑으로, 더 주변으로 스며들어 간 것이지, 그 존재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저자의 권력 환원론적 논리는 너무 진부하고 음모론적이다. 특히 무교와 다른 종교의 역사적 관계를 권력과 억압의 관점에서만 본 것이 특히 그렇다. 한국 그리스도교사의 사례에 국한해서 보자면 1세대 선교사들은 한국의 무교를 미신으로 보는 관점을 끝까지 고수했지만, 이들의 태도는 제국주의적으로만 볼 수는 없으며 권력을 지닌 이들에 의한 일방적인 억압은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 옥성득의 <한국 기독교 형성사>을 인용해보겠다. "샤머니즘에 대한 한국인의 믿음과 마귀의 실존에 대한 생생한 경험이 선교사와 한국인이 서로 교류할 수 있는 접촉점을 제공했다. 북미 선교사는 귀신들림에 대한 한국인의 관점을 수용했고 한국인은 성령의 능력을 경험했다. 능력 대결에 따른 귀신 추방은 기독교의 우월성을 입증해주었다." 권력을 모든 변화의 변수로 본다면, 이러한 교류를 설명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권력에 의한 종교 대체 논리는 조선 시대 때 숭유억불 정책과 천주교 박해에도 그 종교들이 오늘날 많은 성도 수를 거느리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무교의 주변화와 무교의 생명력에 대한 저자의 주장에는 논리적 모순이 감지된다. 저자는 무교가 권력의 논리에 의해 주변부로 밀려났다는 서사를 짜지만, 정반대로 무교는 한국인의 근본신앙으로서 그 생명력을 잃은 적이 없었다. 저자는 무교가 쇠퇴한 역사적 현상과 한국인의 정체성 사이에 있는 이 간극을 "이중적인 태도"로 치부한다. 그러나 이를 공적으로는 무교를 내쫓으려 하면서 뒷문으로 다시 무교를 불러들이는, 위선의 발로만으로 볼 것인가? 동일한 역사적 현상을 저자와 정반대로 해석할 수 있다. 무교는 권력에 밀렸어도 결코 사라진 적이 없으며 오히려 불교와 그리스도교 등 다른 종교를 샤머니즘적 신앙 속에 흡수하여 존속했다. 한국의 종교적 심성에서 가장 흥미로운 현상이 바로 이 부분이다. 어떠한 종교가 들어와도 무교는 이들과 이질감 없이 공존할 수 있다(나홍진의 <곡성>에서 가톨릭 사제와 무당이 동시에 한 영화에 등장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던 것을 떠올려보라). 무교는 체계적 교리가 없어도, 오히려 그러한 교리가 없었기 때문에 무한한 생명력을 지닐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저자가 이중적 태도로 지칭한 것을 그저 위선적 태도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무교와 다른 종교가 접촉하고 결합한 지점을 더 섬세하게 따져봐야 무교, 나아가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을 이해하는 데 더 유익하고 건실한 연구가 될 것이다.
<무교>는 확실히 매우 흥미롭고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을 이해할 때 무교는 간과할 수 없는 요소이며 더 탐구되어야 할 주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이상의 논의를 통해 다음과 같이 촉구한다. "한국의 무교는 모든 면에서 풍부하다. 앞으로 한국인들은 지금처럼 종교 제국주의에 빠져 자신들의 전통을 외래의 시각으로 폄하하고 부정하는 것을 하루빨리 청산하고 열린 마음으로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인들은 무교가 중심이 된 우리의 민간신앙을 연구하는 데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하고 과감한 재정 투자를 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결론은 그저 한국의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좋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국수주의적 태도로 귀결된 우려가 있으며, 실제로 저자가 그러한 오류에 빠져 있다. '외래' 종교인 그리스도교와 불교에 대해서는 비판을 서슴치 않는 저자지만, 무교에 대해서는 작은 흠결 하나도 용납하지 않는다. 특히, 신병을 영적 정화 과정으로 설명하는 대목은 설득력이 없으며, 신내림을 거부하는 무당의 주변 인물이 죽는 '인다리 현상'이 무당에 대해서 부정적인 사회의 책임이라고 지탄하는 주장은 논리가 극히 빈약하다. 저자는 다른 종교에도 알려지지 않았을 뿐 인다리 현상의 사례가 많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본인도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못하니 내놓는 다른 종교의 안다리를 거는 수준의 얄팍한 빈정거림이다.
그리스도교를 믿는 입장에서 또 한 가지 비판을 더 해보자면, 그리스도교의 신을 믿는 것과 무교의 신을 믿는 것은 결코 같은 행위일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고등 신과 저속한 잡종 신령의 구도로 이 문제를 풀어가며 여기서 어느 종교의 신이든 다 마찬가지의 존재라는 결론을 낸다. 그러나 진정한 핵심은 고등 신과 하위 신의 문제가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로마의 다신교 신앙의 문제점으로 비윤리성을 지목했다. 로마의 신들은 인간에게 복종만을 요구할 뿐 윤리적 삶을 명령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신은 신자에게 올바른 삶을 살 것을 요구한다. 다른 고등 종교의 특징이기도 하다. 무교의 신들은 "선악 개념이 불분명"하기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답을 주지 않으며, 신자들의 삶을 책임지지도 않는다. 무당이 사제처럼 신과 인간을 매개하여도 그들이 신자를 보살핀다는 관념은 없다. 무교적 신앙은 있어도 무교적 삶의 방식은 없다. 그저 "금세리 인간들에게 큰 벌을 내릴 것처럼 외치다가도 신도들이 싹싹 빌면 곧 관대한 신으로" 바뀌는 비일관적인 신령들일 뿐이다. 무교적 신앙이 위험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