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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 1 "Introductory: the French Prelude to Modern Historiography"

서문: 프랑스에서 나타난 근대 역사서술의 서곡

이 책은 근대적 역사서술(modern historigraphy)의 부상의 한 측면을 밝히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 쓰였다. 이 부상의 시작점은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할 수 있다. 이후 다른 것과 역사의 성격을 구분짓는 역사가의 기예(art), 즉 과거 사회의 제도(institution)를 재구성하고 이 제도를 당대 살았던 사람들의 행위, 말, 사상을 해석하는 수단으로서의 맥락으로 사용하는 기예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격이 우리가 역사적 방법으로 알고 있는 것의 핵심임은 더 증명할 필요가 없다. 이는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역사 방법과 비교하는 수단에 의해 근대적 역사서술을 고대적 역사서술을 구분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고대 역사가들은 인간사(人間事)에 대한 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서사를 구성하는 기예를 발견하여 총명한 기예로 발전시켰다. 그들은 당대 사회를 현대 사회에는 낯선 것으로 기술했으며 기후와 전통이 다른 맥락 속에서 인간의 행동과 신념이 얼마나 다양한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고대의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문명의 과거에 인간의 행동과 사상이 현재 행동과 사상의 성격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어서 오로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 전체가 부활하여 자세히 기술되고 과거를 해석하는 데 사용되어야만 이해될 수 있는 시간의 흔적이 존재했음을 상정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또한,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가들은 이를 실행할 만한 구분되고 만족스러운 방법이 있다고 단언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이 쓴 역사는 군사적.정치적 사건에 대한 서사로 구성되었거나, 비교 정치적 분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자체의 법칙을 발견하고 과거가 적절한 탐구 방식을 개발함으로써 이해되어야 하는, 특별한 연구대상이라는 가정을 가지고 과거를 조사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과거 자체의 법칙을 발견하고 탐구 방식을 개발하는 것은 서사를 구성하는 오래된 방식보다 우선되는, 근대적 역사서술의 지배적인 성격이다. 역사가들은 사회의 과거 단계에 들어가 연구를 마쳤을 때(그리고 오직 그때에야), 자신의 결론을 서사에 통합하는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 그 주제는 인간과 정부의 행위뿐만이 아니라, 결코 변화를 멈추지 않는 사회 구조,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주제의 두 측면들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과거를 재구성한다는 개념을 발견한 것은 역사가의 정신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서사를 만드는 기예(narrative art)로 파악된 역사, 그리고 역사서술의 역사가에 대한 일차적 중요성이라는 오래된 주장을 가지고 그들의 관심사를 충족했다.

역사서술의 개척자로서는 역설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가들은 과거를 탐험하기 위한 특수한 기법들을 개발하지 않았다. 그와 같은 과거는 그들에게 심대한 중요성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스파티움 히스토리쿰(spatium historicum)', 과거에 대한 그들의 관점에서 역사적인 것과 신화적인 것의 경계의 문제를 논하지 않겠지만, 현재 주장에서 핵심적인 요점 하나는 지적할 수 있겠다. 즉,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자신들의 직접적인 과거에 존재하여 과거의 제도, 과념, 물질(material)과 그 문헌이 살아남아 자신들의 삶의 범위에도 영향을 미치는 조직된 문명을, 중세 유럽인과 근대 유럽인이 과거를 당대와 비슷하게 의식했던 것처럼, 의식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느끼기에는 과거의 세계라면 탐구할 필요가 없었으며, 그들은 증거를 가지지도 않았다. 그들의 역사 감각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탐구하고 외부의 사회와 비교함으로써 전개되었다. 그러나 로마는 우리에게 제시된 과거의 세계라는 감각, 그리고 과거의 세계를 이해하고 오늘날 우리와의 관계를 규정할 필요는 중세 유럽인과 근대 유럽인 모두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과거에 대해 파헤치는 것이 근대 유럽 역사서술의 뚜렷한 특징이라면, 우리는 분명 고대 세계에 빚을 진 유럽의 바로 그 감각의 부상과 기원을 봐야 한다.

우리의 탐구를 시작할 가장 명확한 영역은 고전적 학문 기법에서의 미묘한 변화 - 다시 말해 과거 세계에 대한 접근 방법 -로, 우리가 인문주의(humanism)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그동안 상식으로 여겨졌던 사실은, '고전 고대의 부활'(the revival of classical antiquity)과 같은 구호를, 중세 사상이 르네상스 사상만큼이나 고전적 고대에 천착했다는 사실, 그리고 중세와 르네상스의 차이는 단지, 심오하기는 하지만, 고대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채택한 방법상에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중세인과 르네상스인은 고대의 가르침과 정전(canon)을 가능한 한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 고대를 기준으로 스스로의 형상을 갖추고자 했다. 그러나 중세 시대의 종합과 알레고리화하는 정신이 채택한 방법은 전반적으로 고대의 삶을 당대의 삶 속에 상상을 통해서 혼합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헥토르와 알렉산드로스를 기사로, 그리스도가 빌라도 앞에서 받은 재판을 봉건법의 형태에 따라 벌어진 것으로 상상했다. 더 진지하고 실천적 차원의 학문으로 가면, 로마법의 용어는 아무 망설임 없이 중세 유럽의 통치에 적용되었다. 중세인이 이러한 측면에서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얼마나 의식했는지 결정하는 것은 현 필자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일부는 로마는 그리스도교 세계(Christendom)가 아니라고 느낀 이들이 확실히 있었지만, 과거의 삶이 현재와 어떠한 점에서 다른지를 지적하거나 이를 수행할 체계적 학문을 정초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음은 꽤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인문주의자들이 과거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을 시작한 결과 이러한 경향은 바뀌었다. 그렇지만 이 변화는 우발적이었고 비간접적이며 역설적이었다.

인문주의 사상은 중세인보다도 훨씬 더 강하게 고대 세계를 본보기로서 삼아야 할 필요를 주장했으나, 중세의 가르침을 통해 고대를 제시하는 것에는 격렬하게 불만을 표했다. 그들은, 권위 있다고 여겨지는 고대의 텍스트가 해설, 알레고리, 해석이라는 여러 층으로 겹쳐있으며 종종 텍스트가 아니라 해설이 연구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이 사상은 순수한 텍스트로의 회귀를 요구했으며 - 그러한 외침은 이전부터 제기되었다 - 해설자보다 텍스트를 더 잘 이해해야 함을 계속해서 주장했다. 이 주장은 원천 자료(source-material)를 늘리고 이러한 행위를 더 잘 수행하게 할 수 있는 기법을 향상시킨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우리는 역사서술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인문주의 운동의 역설과 진정한 중요성을 마주한다. 이러한 주장과 요구를 내놓으면서 인문주의자들은 고대 세계를 "그것이 실제 그러했던 대로"(as it really was) 고대로의 회귀를 요구했다는 것과는 별반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근대적 역사적 의식의 문턱에 서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않고는 이러한 언어들에 담긴 인문주의자의 계획을 표현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이행을 완성시키는 역설이란 다음과 같다. 인문주의자는 과거를 따라하고 모방하기 위해 고대 세계를 복원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나, 복원의 과정을 더 철저하고 정확하게 수행할수록 따라하기와 모방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면 이러한 행위가 단순히 따라하기와 모방 그 이상이 될 수 없음이 점점 더 명확해졌다. 고대는 고대 세계에 속한다는 것은 오늘날의 삶으로 가져올 수 없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물들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며, 그 결과 당대 사회와 단순하게 합쳐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근래의 한 연구는 고전 라틴어의 언어와 문법으로 되돌아가지만 사어(死語)로서의 라틴어를 자각하며 끝나는 인문주의자의 노력을 다시 추적했다. 이제 라틴어는 더 이상 유럽인의 일상적 삶의 한 부분으로서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쓰일 수 없었다. 저자에 따르면, 이 문제는 점점 더 순전히 역사적 관심, 심지어 호고적(好古的) 관심사가 되었으며, 사라진 세계의 일부는 그 자체를 위해 주의를 기울여 연구하는 이들에게만 중요해졌다. 그러나 저자는 또한 이러한 과정이 라틴어 저자들이 살았던 세계를 기술하는 것을, 때로는 그들 고유의 눈으로 그 세계를 바라보며 그러한 세계의 일부로서 그들의 저술을 해석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새로운 연구 분과의 성장으로 이어졌음을 증명한다. 다시 말해, 인문주의자는 본래의 목적을 아득히 넘어서면서 그리스 로마의 지혜를 불가피하게 과거의 것으로 전락시켰으며, 종국에는 과거가 현대의 삶에 직접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모든 주장에서 그 지혜를 박탈해버렸다. 그러나 동시에 인문주의자들은 과거의 문제를 독립된 연구 분야로서 관심을 기울였으며 과거의 탐구를 위한 기법들을 열정적으로 개선하기 시작했다. 과거에 대한 연구가 별도의 과학으로 인식되는 것이 근대적 역사가의 징표라면, 그 토대를 놓은 것은 바로 인문주의자들이다.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들은 그리스 로마의 문명이 독립된 세계, 즉 과거의 세계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었지만, 과거가 어떤 면에서 여전히 살아있다는 사실을 통해 깊게 영향을 받는다는 감각을 유럽인의 정신에서 완전히 박탈하지는 않았으며, 실제로 그럴 수도 없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그들의 저작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관계라는 총체적인 질문을 제기했다. 과거가 현재와 관련이 있는가? 과거를 연구할 지점이 있는가? 현재에 생존해 있는 과거의 지위는 무엇인가? 그리고 아마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과거는 어떻게 현재가 되었는가? 라는 질문일 것이다. 역사적 변화의 문제, 고대 문명의 성격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진행되면서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복잡하고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역사적 변화의 문제는 16세기 말 직전 유럽인의 사고에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면 우리가 근대적 역사서술(modern historiography)의 시작을 기대해야 할 것은 바로 인문주의의 역설(paradox of humanism)이겠다.

인문주의자의 공헌은 유럽 학문연구의 여러 분야에서 역사적 관점과 기본적인 역사적 기법을 확립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의 중요성은 우리의 역사서술의 역사학에서 마땅히 받아야 할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명백한 무시에는 여러 원인을 거론할 수 있다. 이 운동은 극단적으로 완만했으며 - 그 효과는 18세기 이전까지는 완전히 느껴지지 않았다 - 과거는 도덕적 교훈을 위해 연구되어야 하며 모방하거나 피해야 할 사례들의 창고라고 계속 믿었던, 자신들이 하는 일의 중요성을 의식하지 못했던 학자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인문주의의 기본 원리는 종종 지적되었듯이 역사 사상의 발전을 방해했으며, 적어도 선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16세기와 17세기 역사서술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며, 그것이 전부인양 서술하는 실수가 저질러져서는 안 된다. 역사상의 발전은 인문주의가 도덕주의로 휘는 경향이 있음에도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으로계속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의 소홀함은, 이러한 발전이 매우 다양하고 발산적이었다는 사실로부터도 설명될 수 있다. 역사서술의 역사는 - 수학, 물리학, 천문학이 과학혁명의 역사에서 중심 주제를 제공한 것 같이 - 한 두 가지 뚜렷하고 쉽게 인지할 수 있는 학문이 빠르게 발전하고 다른 학문을 따라가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수많은 학문의 주변부에서 우연히, 그리고 어쩌면 미약하게 발전하고 각각의 경우에 그 학문분과에 적합한 역사적 기법을 진화시킨 역사적 접근방식의 문제이다. 따라서 역사서술의 서술은 단일한 진화의 연구로 쓰일 수 없으며, 적어도 현재로서 가능한 것은 역사적 관점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분야에서 역사관의 성장을 추적하는 것이 전부이다.

그런데 역사서술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실들은 다음과 같다. 즉 16세기와 17세기에 발전한 비판적 기법은 문학적 서사의 형태로의 역사 쓰기와 매우 천천히 그리고 매우 늦게서야 결합했다, 한편으로는 학자(scholar)와 골동품 수집가(antiquarians) 사이의 분리(divorce),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문학적 역사가와의 거대한 분리가 있었다, 문학적 형태로서의 역사는 학자들에 의해 발전한 비판적 기법을 고려하지도 않고 그 자체로 유사한 기법을 발전시키지 않고도 일종의 피론주의적(pyrrhonist) 반란,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신뢰할 수 있는지에 관한 널리 확산된 회의주의 운동이 일어나기까지 유유히 독자적인 길을 갔다는 것 등이다. 이러한 반란의 성격은 폴 아자르(Paul Hazard)가 연구하였다. 이 반란의 지도자들의 시선은 문학적 서사라는 의미의 역사에 확실하게 고정되어 있었으며, 마빌론(Mabillion)과 같은 학자들이 빠르게 발전시킨 과거에 관한 믿을 만한 사실을 결정하는 비판적 방법을 배제했다. 이 지도자들이 이러한 학자들에 더 면밀히 관심을 가졌다면, 피론주의적 절망의 강도가 덜했을지도 것이다. 그러나 비슷한 오류를 현대의 역사가들도 저지르는 것처럼 보인다. 역사서술의 역사는 역사라는 제목을 단 문학 작품의 역사와 동일시될 수 있는 것처럼 연구되었으며, 그 결과 일방적인 관점이 생겨나 서사적 역사를 쓰지 않은 학자들의 저작의 중요성에 충분한 중요성을 거의 부여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후기의 요한 하위징아(Johan Hauizinga)는 모든 근대 학문의 역사는 중세 대학에 거의 빚진바가 없다고 쓴 적이 있다. 이러한 예외를 제외하면, 하위징아는 근대 학문은 신학, 의학 또는 법학이라는 세 중요 학부 중 하나 또는 삼학(trivium)이나 사과(quadrivium)라는 하위 기예의 하나에서 싹을 틔우는 과정을 통해 발전했다고 말했는데, 역사학이 중세의 커리큘럼에서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면 수사학의 하위분과이나 비판적 목적이나 방법 없는 단순한 낭독 형식으로서 드러났던 것이며 그 결과 역사학의 비판적 학문으로의 발달은 완전히 대학 외부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이제 이러한 판단은 우리가 그 이름을 낳는 문학적 형태와 역사를 동일시하기로 할 때만 유지될 수 있다. 그러한 집착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우리는 - 다양한 표준 저작을 통해 잘 알려진 - 다음의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즉 최고의 독창성과 복잡성을 지닌 비서사적인 역사학 저작은 16세기 - 이 시대는 대학 조직과 커리큘럼이 여전히 매우 중세적이었다 - 프랑스 대학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역사적 사상은 법학부에서 발달했다는 것이다. 르네상스의 사법적 역사학파는 이 장 나머지 부분의 주제를 이루지만,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역사서술의 역사에 대한 교과서적 설명은, 16세기와 17세기 학자들의 공헌이 서사적 역사와 결합하여 오늘날의 역사학 저술과 상당히 유사한 저술을 생산했다면 그 공헌은 로버트슨(William Robertson)이나 기번(Edward Gibbon) 같은 거인들이 사용했을 어느 정도 검증된 사실의 방대한 축적에 지나지 않았다는 인상을 준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초창기의 학자들은 사실을 역사적 맥락으로 되돌려 사실을 해석하는 데 어느 정도 의식적으로 관여했으며, 이미 제시한 바 있듯이 이는 역사적 반성(reflexion)에 대한 복잡한 문제, 즉 과거와 현재의 과거 및 현재에서의 과거의 생존에 관한 문제를 제시할 수밖에 없다. 법률가들에게 있어 이 문제는 특별히 더 중요했는데, 그들이 과거의 맥락에 부여하는 자료들은 동시에 현재 사회가 스스로를 통치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16세기 학자들이 우려했던 역사적 문제는 성숙하고, 시급성이라는 점에서 실천적이었으며 심지어 철학적으로 심오할 수 있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그들의 사상은 그 자신과 더불에 그의 세대에 매우 중요했을 수 있으며, 자신의 문명에 대한 역사적 이해에 영구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류의 사상은 역사서술의 역사에서 실질적으로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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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중국의 역사와 역사가들>과 <역사와 역사가들>은 

서양과 중국의 역사관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할 수 있는 설명을 제공한다. 


<각주의 역사>는 위에 번역한 부분을 각주라는 학문적 기법을 통해서 세밀하게 이해할 수 있어 지식을 확장시킬 수 있는 책이다.


<코젤렉 개념사 사전: 역사>는 '역사'라는 개념이 변화한 역사이니 참고용으로 보면 좋다. 라인하르트 코젤렉의 <지나간 미래>도 같이 읽으면, 서양에서 역사인식의 변화를 더 거시적인 역사적 변화와 연결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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