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여 완성되지 못한 유고작이다.
그래서 퇴고를 거치지 않아 문장이 거칠고 정돈되지 않았다는 인상을 준다.
그렇지만 가난과 이방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카뮈의 날카로운 통찰이 돋보이는 소설이다.
주인공 자크 코르모리는 어머니의 권유로 자신이 1살 때 사망하여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아버지의 무덤을 처음으로 찾아간다. 무덤 앞에서 그가 본 것은 현재 자신의 나이(40살)보다 더 젊은 나이에 사망한 아버지(26세에 사망)였다. 그는 부조리("억울하게 죽은 어린아이 앞에서 다 큰 어른이 느끼는 기막힌 연민의 감정", 33)를 느끼고 아버지의 자취를 찾아나선다.
아버지를 찾는 과정에서 정체성과 가난에 대한 묘사가 합해져 이 소설의 깊이를 더한다.
"가난이란 일부러 선택하는 것은 아니지만 없어지지 않고 줄곧 따라다닐 수는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76)
"가난한 사람들의 기억은 벌써 부자들의 기억만큼 풍요롭지 못하다. 자기들이 사는 곳에서 떠나는 적이 거의 없으니 공간적으로 가늠할 만한 표적이 더 적고 그게 그 턱인 단조로운 생활을 하니 시간적으로 가늠할 만한 표적이 더 적었다...잃어버렸던 시간을 되찾는 것은 오직 부자들뿐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잃어버린 시간은 그저 죽음이 지나간 길의 희미한 자취를 표시할 뿐이다. 그리고 잘 견디려면 너무 많이 기억을 하면 못 쓴다" (90)
"그들은 이제 더 이상 가난에 쪼들리지 않았지만 습관이 들어서, 그리고 또 삶의 고통을 견디어 온 사람들 특유의 불신 때문에 여전히 궁핍을 먹고 살았다. 그들은 동물적으로 삶을 사랑하고 있었지만, 삶이란 또한 그 뱃속에 가지고 있는 줄도 몰랐던 불행을 규칙적으로 낳아 놓곤 한다는 것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143)
그는 이민자인 아버지가 발 밟았을 항구에 도착하여 아버지를 발견한다.
"그는 한 번도 본 일이 없고 키가 큰지 작은지도 알지 못하는 아버지를 보았다. 그 본 항구의 부두에서 기중기들이 여행 동안 무사히 견딘 보잘 것 없는 가구들을 실어 내리고 잃어버린 가구들 때문에 말다툼이 벌어지고 있을 때의 그 이민들 가운데서 아버지를 본 것이다." (195)
그 이민자들은 마치 자크의 아버지처럼 "자식들을 낳아 놓고 사라졌다. 이렇게 그들의 아들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또 그들의 아들과 손자들 역시 오늘 자크 자신이 그렇듯이 과거도 윤리도 교훈도 종교도 없는 채 이 땅 위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었고 또 그렇게 된 것을...행복해 하고 있었다. 그 모든 세대의 사람들, 서로 다른 고장에서 지금은 어느새 황혼의 기미가 떠오르는 이 기막힌 하늘 아래로 찾아왔던 그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를 안으로 닫은 채 아무 자취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그들 위에는 엄청난 망각이 드리워졌다."
최초의 인간은 가난한 이주민들의 망각의 땅을 걸어가는 모든 사람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지금을 사는 것으로도 벅차기 때문에 과거의 좋은 일도 힘든 일도 기억하는 것조차 어렵다. 그래서 그들은 과거를 잊고, 그저 동물적으로 삶을 살아간다. 이들은 자손들에게 남기는 자취도 없다. 그래서 자손들은 앞선 세대를 망각하고 저마다 새로운, 최초의 삶을 살아간다. 그래서 "오랜 세월의 어둠을 뚫고 걸어가는 그 망각의 땅에서는 저마다가 다 최초의 인간이었다."(203)
'최초의 인간'은 소설의 내용에 비추어 보면 자크의 아버지, 또는 자신의 뿌리가 되는 최초의 인간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 동시에 그 뿌리에서 잘려나가 세상의 모든 사태를 최초로 경험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최초의 인간일 수도 있다. 그들에게는 전통은 무의미하다. 과거의 '종교, 윤리, 교훈'은 지금의 나와 아무런 접점이 없으며, 모든 인간은 삶의 지침이 되어줄 수 있는 과거와 전통으로부터 유리되어 전적으로 처음 접하는 세계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경험을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는 실존주의의 테제이며, <최초의 인간>은 실존주의의 인간관을 집약하는 제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