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내 생애 처음 만난 윌리엄
트레버는 생각보다 더 치밀한 서술을 보여주면서도 소설을 읽고 있다기보다 티타임을 가지며 누군가 옆에서 이야기를 해주는 살가움을 잃지 않았다. 독자를 한 없이 쥐락펴락 했으며 순진하고 어린 펠리시아라는 주인공을 통해 읽는 내내 목구멍을 막히게 하는 고구마
한 상자도 내게 선물했다. 루시골트 이야기, 비 온 뒤 등
트레버의 다른 작품을 번번히 완독하는데 실패한 나로서는 출간 되자마자 구입해, 드디어 처음 제대로 트레버를
영접한다는 더 없이 설레는 마음이었던 터라 이리저리 치이고, 당하면서도 홀로 길 위를 걷는 펠리시아의
여정이 곱절은 더 슬프게 다가왔다.
흔히 작가들의 작가로 평하는 윌리엄트레버는 아일랜드 출신 작가지만, 훗날
영국으로 이주해 많은 집필활동을 하고 그곳에서 영면한다. 생전 그는 아일랜드를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아일랜드를 볼 수 있었다고 말했는데, 트레버의 이러한 한 걸음 떨어진 외부자의 시선으로 바라 본 더
‘보편적’인 묘사와 서술방식으로 쓴 펠리시아의 여정은 역시
동양의 외부인인 내게 아일랜드와 영국의 관계, 나아가 1994년
출간된 즈음의 영국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여’주었다. 마치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내 옆집, 내 동네에서
일어난 일 마냥 ‘알려주는 것’이 아닌 ‘보여주는 점’이 흥미로웠다.
내가 이 책을 집어 든 건, 비단 작가가 유명해서만은 아니다. 사족이라면, 최근 치솟는 모드(치솟는
확진자수로 인한 동네 카페 방문도 자제하는 시대, 치솟는 폭염의 기세,
치솟는 부동산 시장으로 인한 치솟는 무력감과 무기력함, 예나 지금이나 미래에 저당 잡힌
볼모 같은 신세랄까)가 계속되는 내 일상에서 느끼는 처절함, 우울
같은 감정을 조금이나마 걸러내고 싶은 차에 띠지 문구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잃어버린 기회와 가망
없는 희망에 대한 슬프고 감동적인 이야기.’(마치코 가쿠타니 문학비평가, 서평가)
다 읽고 난 후의 느낌은 글쎄, 왜 작가는 펠리시아를, 한없이 착하고 연약한 이 소녀를 이토록 곤경에 빠뜨리고, 속수무책
당하며 결국 아이까지 잃고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게 했을까 아무리 그 시대(든 현재 든 약자의 세상살이는
크게 달라지거나 발전한 거 같지도 않지만) 상황이 그러했다 치더라도 조금만 더 씩씩하게 헤쳐나가는 기지를
발휘하는 주인공을 만들 수는 없었을까 결국 속이 문드러지게 고통스럽고 난 후에야 어떤 깨달음을 얻는다, 비로소
안정을 찾아간다. 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나는 역경을 딛고 우뚝 선 판에 박힌 영웅담으로 대리만족을
하고 싶었던 걸까 그것은 내가 아직도 유치한 건 아닐까 별의 별 생각에 머리 속이 시끄러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20세기 후반을 사는 사람도, 그로부터 30여년이 흐른 후인 현재의 나도 살아있고, 살아간다는 것은 때때로
참 버겁고 매 순간 어찌할 바를 모르게 만드는 그런 사건들이 예고 없이 일어나며 인생에는 연습 게임이 없다는 진리를 또 곱씹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월이 지나도 이런 다양한 모진 풍파를 겪는다는 묘한 동질감을 위안 이라도 삼아야 할 까 보다. 펠리시아도 그렇게 자신의 생을 부딪혀 나간다. 실패한 사랑, 떠나 보낸 뱃속 아이, 자신을 욕하는 부모, 돌아갈 곳 없는 신세, 목숨의 위협까지도 다 겪어내며 돌아가지 않고
뒤돌아보지 않으며 현재에 시선을 두고, 머무르며 자고 또 일어나 걷는다. 아일랜드인으로 약자로 아웃사이더로 그렇게 세상 가장자리 선을 넘었다. 이제
그녀의 발은 세상의 ‘안’쪽을 향하고 있는지 앞으로 안전하게
축복을 받을지 알 수 없지만 얼굴을 살짝 기울여 반대편을 햇살에 맡긴다. 계속 걸어가고 있다. 힐디치씨처럼 세상’밖’ 이라는
죽음을 택하지 않고 자비와 경멸 그 사이 어딘가에서 스스로의 자리를 만들기를 선택한다.
주인공 펠리시아 못지 않게 이 소설은 힐디치라는 인물에 대해서 여운이 짙었는데, 펠리시아만큼이나 안타깝고 가엽다. 이 둘은 제대로 된 어른을 부모를
경험하지 못하고 성장한 공통점이 있지만 힐디치는 일그러진 상처를 품은 스스로를 결국 놓아버린다. 끝없이
그가 갈구한 것은 비대해진 몸의 크기만큼 원했던 것은 과연 사랑이었을까. 상처가 없었다면 그의 마지막은
조금 달라졌을까?
아일랜드의 여성 혁명가의 이름을 따라 지었다는 펠리시아란 이름처럼 떠오르는 많은 생각 속에서 굳이 의미를
찾지 않고 거리를 거닌다. 혼자서 더 이상은 아이도 소녀도 아닌 것을 감사한 일이라 굳게 믿으며 오늘도
살아가겠지. 심장이 무슨 이유로 멈추는 것보다 스스로를 더 이상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 인생을 내 손으로
마감하는 일이 많은 요즘, 연이은 폭염에 쉼표가 필요한 사람이라면, 또
새로운 길 위에 꼼짝도 못하고 있는 누군가 있다면 펠리시아를 따라 길을 떠나봤으면 한다. 삶의 아이러니와
연민 속에 인생의 휴가를 얻어 다시 호흡을 할 수 있게 될 지 모를 일이다.
한순간 거기 있다가 바로 다음 순간 사라지는 희망, 위안의 조그만 부스러기라도 찾고 싶어 낙담한 가운데서도 손을 뻗으며- P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