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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빛 세상
  • 가장낭독회
  • 기원석
  • 10,800원 (10%600)
  • 2024-08-01
  • : 1,062


오랜만에 시집을 한 편 읽었다. 시를 잘 모르긴 하지만 시라는 게 원래 내가 느끼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내 마음대로 읽을 것이다.  


<가장낭독회>에서 시인은 시와 시인, 그리고 글쓰기에 대한 사념이 많다고 느꼈다. 아무도 시를 읽지 않는 시대에 계속 시를 쓰는 시인은, 요즘 같은 시대에 누가 시를 읽느냐고 푸념을 하고 (그런 걸 뻔히 알면서도 여전히 시를 쓰는 자신 같은) 시인을 혐오하는 듯하지만, 분위기에 맞지 않게 괜히 오버하고 유난을 떨며 혐오를 내비치는 시인의 말을 들어보면, 반대로 그가 시 쓰기를 얼마나 열망했는지, 독자들을 기다리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시집은 바게트

...

요즘 누가 바게트를 먹겠어

프랑스인도 아니고

독백에서

깨달음을 얻는 그는 이제

바게트로 그의 독자를 

두들겨 팬다. 

...

바게트 사세요

바게트 사세요

제발 사세요

외치는 독자들의 화음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가오느 수많은

비둘기들을 내쫓는 제빵사의

숱한 헛스윙과

이 모든 광경을 유유히

지나쳐 가는 수많은

프랑스인들로 가득하고

_기원석, 「바게트」 중에서 


다섯 편 혹은 열한 편의 시가 무대에 오를 것이다 그들이 고개 숙여 독자에게 예의를 갖추고 자리에 앉자마자 시가 시작될 것이다 그들이 각자의 원고를 꺼내어 동시에 읽고 누가 제지할 틈도 없이 뒤섞일 것이다 단어들이 드문드문 들리고 한 편에 집중하려고 치면 다른 한 편이 목청을 높일 것이다.

_기원석, 「튜토리얼」 중에서

 


이번 시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튜토리얼」이라는 제목의 시가 몇 편 더 있는데 「튜토리얼」들은 대부분 좋다) 시들이 무대에 오른다는 발상 자체가 아주 기발하다. 나는 상상해본다. 가운데만 불이 밝혀진 어두운 무대에 다섯 편 혹은 열한 편의 시들이 무대에 오르는 모습을. 그들이 각자 원고를 읽으며 목소리가 뒤엉키는 불협화음을. 그들은 “소리를 높이고 독자에게 밀착하고 주목받는 곳으로 자리를 옮기”지만 잊지 말아야 하는 룰은 독자는 “모든 것을 그대로 흘려보내야 한다는 사실”이다. 시들은 “사소한 무엇이라도” 건드리고 싶어 서로 난리버거지를 치지만 결국 무대에 남은 것은 어지러이 널려 있는 철제 의자뿐인 무대를. 


(이런 공허한 무대를 연상시킨 시 다음에 나오는 시가 「가장낭독회」이고 시인은 또 천연덕스럽게 “낭독을 위한 지시 사항”을 읊는다는 게 좀 웃기다) 


이번 시집에 실린 시들은 대체로 드라이하고 무감정한데 그 와중에도 몇몇 과하지 않게 촉촉한 시들이 나와서 전체적인 밸런스를 맞춘다. 가령 「미싱」이나 「스노볼」 같은, 그리움 혹은 양가적 감정을 드러내는 몇몇 시들이. 


상상 속의 책상 위에는

노루발 같은

편지가 하나 있었다

아침마다 답장을 적어 보냈고

그것은 새벽마다 

뜯어진 흔적도 없이 반송되었고 

...

나는 야트막한

발자국을 따라나섰습니다

먼 기슭까지 아름답게 빛나는

엽총을 들고

메아리치는 누군가의 울음을 쫓듯

...

나는 발소리를 죽이며 상상했습니다

사냥을 마치면 

...

당신을 만나러 가야지

품에 넣어둔 답장을 건네줘야지 


_기원석, 「미싱」 중에서 


 

누군가 내게 줄 답장을 품은 채 엽총 들고 사냥을 다녀왔다고 하면 꽤 섬뜩할 것 같긴 하지만. 


 너에게 커다란 수박을 건네받았다 그것은 하얗고 줄무늬가 무성한 달이다 두려움처럼 명멸하는 달을 너에게 도로 건네준다 하룻밤을 넘기지 못하고 달이 내게 굴러온다 나는 이걸 안아도 보고 굴려도 보건만 차마 먹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

과연 며칠 만에 돌아온 달은 내 방을 한가득 차지하고 밀림 같은 배를 드러내고 있다 칼집을 내듯 들창을 여니 물기 가득한 달의 속살이 한기에 떨고 달빛은 웅덩이처럼 고인다 


_기원석, 「스노볼」 중에서



「스노볼」이란 시도 참 좋다. 내가 받은 수박을 너에게 주지만 수박은 다시 내게 굴러오고, 그렇지만 나는 차마 먹을 수 없고, 결국 너에게 다시 건네지만, 수박이기도 달이기도 한 그것은 다시 내게 굴러온다. 결국 나는 칼을 들어 그것을 자르는데, 그 안에 있는 것이 너무나도 작고 소중하고 어찌할 줄을 몰라 커튼을 쳐준다. 주고 받고 하는 게 마음일 텐데, 그런 당연한 것도 편하게 할 수 없었던 때가 있다. 우리 누구나 다 그럴 것이다. 그건 상대가 싫어서가 아니었고, “차마 먹어볼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에. 원래 너무 소중한 것들은 스스로를 불안하게 하니까.



과연 며칠 만에 돌아온 달은 내 방을 한가득 차지하고 밀림 같은 배를 드러내고 있다 칼집을 내듯 들창을 여니 물기 가득한 달의 속살이 한기에 떨고 달빛은 웅덩이처럼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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