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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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빛 세상
  • 낱말의 장면들
  • 민바람
  • 15,120원 (10%840)
  • 2023-11-07
  • : 1,169

글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너무 흔하지 않으면서도 어렵거나 젠체하지 않고, 내가 표현하려 하는 바를 정확하고 경제적으로 표현해주면서도, 말맛도 있는 그런 ‘알잘딱깔센’ 단어를 찾아 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 얼마나 어려운지. 나는 내 상황이나 마음을 깔끔하게 표현해주는 그런 문장을 자유자재로 쓰는 순간을 늘 꿈꿨는데, 이 책을 읽으며 그런 말을 지칭하는 단어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바로 ‘산말’(실감 나도록 꼭 알맞게 표현한 말)이라는 단어다. 그렇다, 나는 산말을 찾아 헤맸던 것이다. 


이 책에는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잘 쓸 수 있는 낱말들을 60가지 넘게 소개하고 있다. ‘난든집’이니 ‘콩켸팥켸’니 ‘맞은바라기’니 ‘곰비임비’니 낯설기도 하고 조금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단어들도 있지만 그 뜻은 우리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표현하는 말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러나 이런 단어들을 사전처럼 정의만 딱딱 끊어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힐링 에세이에 녹여주어 기억에 더 오래 남거니와, 그 옆에 낱말의 사전적 뜻풀이도 함께 적어줘 바로바로 뜻 확인 가능하다. 


직업 특성상 국어사전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찾아보는 내게도 이 책에서 만난 단어들은 꽤나 낯설었는데, 이렇게 새로 면을 튼 우리말들을 어떻게 사용할까 생각하니 기분이 좋다. 군인에게는 총알이, 미용사에게 가위가 필요한 것처럼, 글쟁이들에게는 새로운 낱말들이 많이많이 필요하니까.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대학원에서 국어학과 한국어교육학, 한국학을 전공한 작가는 오랫동안 외국에서 외국인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저런 마음의 병으로 허든거릴(다리에 힘이 없어 중심을 잃고 이리저리 자꾸 헛디디다) 때마다 지친 마음을 쓰다듬고 나아갈 길을 열어준 것은 낱말들이었다고 하니, 이 대목에서 나는 ‘누가 국문학자 아니랄까 봐’ 하고 눈을 흘겼지만 그 모습도 너무 부럽고 좋아 보였다. 뭐든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서 힘을 얻고 에너지를 얻는 법이니까. 우리말로 풀쳐생각(맺혔던 생각을 풀어버리고 스스로를 위로함)하고 우리말로부터 옥실옥실한(아기자기한 재미 따위가 많은 모양) 위안을 얻는 결과,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을 든든한 자산을 만든 것이니까. 


어떤 낱말이 있다는 건 그 말을 만들고 사용했던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증거다. 지금 내가 걷는 길이 힘들고 외로워도, 누군가 앞서 걸었던 길이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마음이 든든해지는 법이다. 그래서 낱말에도 치유의 힘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본문 발췌



어젯밤에도 나와는 상관도 없는 태국 광고 영상을 줄줄이 보면서 잘 시간을 넘겼다. 불안을 덮고 싶어서. 때로는 부란할 일이 특별히 없을 때조차 잠자리에 누우면 지구 멸망의 서사를 쓰곤 했다. ‘이제 진짜 자야 돼. 지금도 늦었어.’ ‘이미 그럴ㅆ어. 내일 일을 망칠 거야.’ ‘잠도 안 오는데 핸드폰이나 볼까? 안 돼. 눈이 청광에 노출되면 잠이 더 날아난다고.’ ‘요즘 모니터 볼 때 눈이 가물거리는데 벌써 노안이 온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눈은 더 말똥해지고, 결국 휴대폰으로 ‘노안’을 검색하는 수순이다. 


그럴 때는 누워서 눈썹씨름(잠을 자려고 눈을 붙이는 일을 비유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라는 게 위안 아닌 위안이 된다. 눈썹씨름이라는 말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심각했던 마음이 누그러지고 살짝 우스워진다. 불면에 관한 농담 같은 낱말. 이 말을 처음 쓴 사람은 잠들려고 억지로 감은 눈에 얼마나 힘이 들어갔으면 눈썹으로 씨름을 한다고 생각했을까. 온갖 생각으로 스스로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던 나는 눈썹과 함께 마음에도 힘을 풀기로 한다.



-


내가 이 관계를 오랫동안 지킬 수 있을까?

지키긴 뭘 지켜. 관계는 누리는 거지.

돌아온 말이 마음을 크게 흔들었다고 했다.

나 역시 관계는 흠집이 나지 않게 지켜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 어떤 관계든지 훼손되고 나면 되돌리기 어렵고, 긴 시간 훼손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니 길어지면 모두 망가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천천히 알게 되었다. 관계는 그런 게 아니었다. 훼손된 흔적을 지워야만 건강하게 지속되는 게 아니라, 시간 위에 함께 남기는 흔적 그 자체였다. 


-


공항 리무진을 타고 멀어지던 나를 볼 때 아버지는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 매일 함께하던 시간이 다시 오기 어렵다는 것. 그리고 그 거리는 내가 떠나며 살기로 마음먹었거나 두 분이 헤어져서 생긴 게 아니라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부모와 자식의 거리라는 걸. 


엄마에게 오지 말라는 연락을 받은 날, 밤늦게 휴대폰을 확인했다. 대화창에 사진 한 장이 떠 있었다. 활짝 웃고 있는 엄마의 셀카. (...)

-엄니 왜 갑자기? 보고 싶을까 봐?

-ㅎㅎ 생머리 하고 싶어서... 딸이 보고 싶어 하기도 할 것 같고... 보여주고 싶어서... 



‘사춤을 치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사춤‘은 ‘담이나 벽 등의 갈라진 틈‘을 말하고,
‘사춤 치다‘는 그 틈을 진흙으로 메우는 일을 말합니다.
저에게는 갈라지고 벌어진 마음의 틈새를 사춤 치도록 해준 것이 우리 낱말이었습니다.
많은 이가 이미 같은 생각을 지나왔다는 것,
그렇게 그저 살아갔다는 사실이 작은 힘이 됩니다.

낱말이 모여 글이 되듯이 순간이 모여 삶이 됩니다.
낱말이 주는 위안과 용기는 미약하고 짧겠지만,허든거리는 순간마다 그것을 꺼내 볼 수있다면삶에서 반짝이는 순간도 늘어가지 않을까요.-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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