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학문에서 그러하듯이, 역사에서도 타인의 관점을 들여다보고 사유하는 과정은 소중하다. 독선적인 학문은 발전할 수 없다. 수용하고 개선하여 더 나은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서 다양한 관점을 소비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덕일 작가의 책은 자신의 관점을 드러내고 비판을 수용하기 위한 자세를 보이지 않는다. 독자를 자신의 사상에 매몰되게 하고 날카롭게 창을 세워 반론자를 찌르려 든다. 끝없는 흑백논리는 자신의 옹호자를 제외한 모두를 식민사관이라는 거미줄에 묶인 가엾은 나비로 만들어 버린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나는 정치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진보 보수의 문제는 이덕일 작가의 책을 바라보는데 하등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덕일 작가가 재야 역사학계를 대표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재야 역사학과 사이비(유사) 역사학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전자는 학문인 반면 후자는 장르일 뿐이다.
필자는 사이비 역사학 관련 도서를 몇권 읽어봤다. 현란한 글솜씨와 흥미깊은 주제들. 그러한 도서들은 대중들에게 어필하기 좋은 포인트라고 생각하며 사회에 역사라는 학문을 깊게 각인시키는 것에 기여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문제가 되는 지점은 그 과정이 졸렬하고 비겁하기 그지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실을 사용하지 않는다. 사실을 주무르고 변질시켜 자신들의 입맛에 맞춰놓은 다음 그 무언가를 사실입니다 라며 내놓는다.
이덕일 작가의 책이니만큼 이덕일 작가를 예로 들겠다. 이덕일 작가는 독립운동 전공자이나 조선사를 주로 다루며 다양한 시대의 책을 저술한다. 덕분에 그의 사관은 다양한 시대를 배경으로 활동한다. 잘못된 것은 아니다. 실제로 현재 확립된 조선 초기의 모습들(예를 들어 세조에 관한 재평가)에는 이덕일 작가의 공로가 확실히 있다. 그러나 이후 그의 모습은 실망스러울 뿐이다. 이덕일 작가의 저서인 '사도세자의 고백'에서 이덕일 작가는 태묘(太廟)에 건원릉, 태조의 묘라는 주석을 달았다. 이덕일 작가의 부족한 조선사 소양을 드러내는 이 대목은 이를 통해 혜경궁의 '한중록'을 비판했다는 점에서 큰 문제점으로 발전한다. 한중록에서는 사도세자가 22살까지 영조의 능행에 따라가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이덕일 작가는 영조와 사도세자가 태묘에 수가했다는 기록을 통해 이를 비판하고 한중록이 거짓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태묘는 종묘를 의미하며 심지어 묘의 한자조차 다르다. 이덕일 작가는 한울타리 안에 있는 종묘를 가는 길을 능행수가라고 표현하는 과분한 저술 실력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그의 부족한 조선사 소양인지, 혹은 그가 잘 주무른 역사적 사실인지 필자는 알 수 없다. 주로 저술하는 조선사에서도 이러한 모습이 보이는데 고대사까지 내려가버리면 그 이상 말하기도 어렵다.
확실히 사이비 역사학은 달콤하다. 이덕일이 주장한 바와 같이 '자국에게 불리한 사실은 가르치지 않아도' 괜찮다. 한사군은 한반도 내부에 없었다. 계속해서 출토되는 유물들은 조작된 것일 뿐이며 한반도의 영토는 순결하다. 그럴 시간에 광개토대왕을 배워라. 편협하다. 그리고 졸렬하다. 역사는 사실이기 때문에 신성하며 역사가는 그 사실을 다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덕일 작가의 2개월짜리 노력에 시간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을지, 역사라는 학문에 역사가의 관점이 얼마나 중요하고 사실을 사용하여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기본적인 것인지, 독자분들이 더욱 심사숙고하여 이 책을 구매하시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