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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맘님의 서재
  • 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
  • 고혜경
  • 19,800원 (10%1,100)
  • 2026-03-30
  • : 1,455

이번에는 헤파이스토스였다

상처 입은 신이라니.

버림받고 절뚝거리는 몸으로 신들의 무기와 장신구를 만들어 냈다니.

상처를 견디는 것만으로도 고단한데, 그 상처의 자리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내며 살아가는 신이라니.

헤파이스토스는 읽는 내내 마음에 걸렸다.

예전에 읽었던 신화에서는 헤르메스와 디오니소스가 많이 와 닿았다.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내는 헤르메스, 억압된 몸과 감정을 풀어내고 환희를 깨우는 디오니소스. 그때는 아마도 자유롭고 싶었고, 어디든 넘어가 보고 싶었고, 굳어진 것들로부터 풀려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 “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을 읽으면서는 뜻밖에도 헤파이스토스가 오래 남는다. 같은 신화를 읽는데도 왜 이번에는 다른 신이 나를 붙잡는 걸까. 내가 지금 서 있는 자리가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예전에는 경계를 넘고 해방되는 힘이 필요했다면, 지금은 상처를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에 눌려 있지 않고, 그 자리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힘을 더 오래 바라보게 된다.

헤파이스토스는 어머니에게 버려지고, 신들의 세계에서 밀려나고, 온전하고 아름다운 몸을 가진 신들과는 다르게 절뚝거리는 신이다. 그런데 그는 상처 입은 자로만 머물지 않는다. 대장간으로 가서 불을 피우고, 쇠를 두드리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

‘상처를 창조성으로 바꾼다’는 말은 얼마나 뜨겁고 고독한 일일까. 상처가 있다고 저절로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고, 아팠다고 저절로 깊은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상처의 자리에서 불을 견디고, 반복해서 두드리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간 속에서도 자기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야 한다. 그래서 헤파이스토스는 더 애틋하다.

마침 이 책을 읽는 동안 헤파이스토스의 이미지와 닿아 있는 듯한 꿈도 꾸었다. 꿈속에는 상처와 벌레, 아버지, 견뎌야 한다는 말, 그리고 내가 던지지 못하고 붙들고 있던 불쾌한 감각이 있었다. 책을 읽지 않았다면 그 꿈을 그저 징그럽고 이상한 꿈으로만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헤파이스토스를 읽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꿈 앞에서 조금 다른 질문을 하게 되었다.

‘나는 무엇을 견디고 있는가’

‘견디는 것과 계속 붙들고 있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내가 상처라고 부르는 것 안에는 무엇이 아직 살아 있는가.

‘그리고 나는 그 상처로 무엇을 만들어 내고 있는가’

이 책은 그리스 신화 속 남신들을 설명하는 책이지만, 읽는 사람에게는 결국 자기 안의 원형을 만나게 하는 책이다.

같은 책도, 같은 신화도, 내가 어떤 삶의 자리에 서 있는가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 예전의 나에게는 헤르메스와 디오니소스가 말을 걸었다면, 이번에는 헤파이스토스가 조용히 내 앞에 앉아 있었다. 상처를 없애겠다고 하지도 않고, 상처가 너의 전부라고 하지도 않은 채, 그저 불을 피우고 자기 일을 하는 신.

 

신화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내 안에서 어떤 힘이 움직이고 있는지를 알아보게 하는 언어라는 것을 다시 느끼게 해 준 책이다.

 

지금 내 안에서는 어떤 신이 말을 걸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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