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오리너구리님의 서재
  • [전자책] 채식주의자 (개정판)
  • 한강
  • 13,600원 (680)
  • 2022-03-25
  • : 48,477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채식주의자』를 읽으며 내가 받은 인상은, 이 작품이 고통과 욕망을 다루는 방식이 지나치게 미화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초반부터 감정의 밀도가 높은 자극적 키워드들이 연속해서 등장하며 인물의 붕괴를 강한 장면으로 축적한다. 이러한 강렬한 장면과 감각이 작품 전반의 정서를 이끌어간다.

하지만 그 감각은 사유로 충분히 확장되지 않는다. 고통은 대부분 하나의 미학적 표면 위에서만 머무르게 되고, 인과는 비어 있다. 관계의 구조 역시 충분히 전개되지 않은 채 감정의 압력만 불균형하게 커진다.


 중심 인물 영혜는 계속해서 침묵, 식물, 순수, 광기 같은 기호적 이미지로 환원된다. 그는 설명 불가능한 순수성과 비일상적 감응을 응축한 존재로 신화화된다. 이 신화화는 단지 타인의 왜곡된 시선에 대한 재현 수준을 넘어 작품의 미학적 조직 원리 자체를 이루고 있다. 이는 영혜라는 한 인간의 다면적 층위를 보여주는 것을 막으며, 그를 현실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그의 입체적인 내적 언어를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판단, 책임, 모순 역시 흐려지게 되고 그 결과 영혜는 서사 속에서 일방적인 감상과 연민을 끌어내는 대상이 된다.


 이 점은 2부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형부의 시선은 영혜를 끊임없이 숭고화하고 특별한 존재로 떠받든다. 가녀린 몸, 초월적인 분위기, 이해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식의 묘사가 반복되며 영혜는 그의 뮤즈처럼 다뤄진다. 이것이 남성 인물의 왜곡된 시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공조적 뉘앙스의 불편감을 주는 이유는 작품이 그 시선을 함께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형부는 착취자가 아니라, 너무 예민하고 섬세해서 사회적 규범으로부터 일탈하는 예술가처럼 그려진다. 작가가 예술이라는 관념을 호출하는 방식은 사실 익숙하다. 금기는 특별한 감수성의 표지로, 충동은 심오함의 징후로, 위험한 욕망은 미학적 사건으로 승격된다. 모든 것을 예술의 이름으로 쉽게 포장해버린다. 예술은 그 과정에서 문제적 욕망을 고급화하는 장치로 사용되는데, 이는 현대 예술에 대한 다소 피상적이고 나이브한 상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 환상은 규범 밖의 욕망을 더 깊은 것으로 만들고, 그 감각을 포착하는 예술가의 시선에는 암묵적 권위를 부여한다.

이처럼 비윤리성과 광기를 예술적 특권처럼 다루는 흐름은 오래된 낭만주의적 도취의 클리셰 문법이다. ‘특별한 미학을 지닌’ 여성을 욕망의 대상이자 어떤 고귀한 상징으로 변환시키는 구조이다.


 이후에도 중심축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인혜 시점으로 옮겨온 뒤에도 서사의 중력은 여전히 영혜에게 기울어 있다. 인혜가 감당하는 책임과 희생은 자체적인 무게를 얻기도 전에 영혜의 고통을 둘러싼 정서적 배경으로 흡수된다. 심지어 형부, 즉 그의 남편에게 있어 인혜는 사회에 순응적인 여성의 대표격이자, 그 반대를 상징하는 영혜의 순수성과 숭고성을 더 부각시키기 위한 도구적 역할 또한 부여받는다. 이는 영혜의 특별함을 발견하지 못했던 평범한 전 남편이라는 구조와 더불어, 다소 유치하게까지 읽히는 특정 인물에 대한 작가의 자기투영적 설정으로 읽혔다.

결국 인혜의 삶은 독립적 축으로 다뤄지지 못하고, 영혜의 고통을 더 잘 설명하기 위한 보조적 장치로 축소되는 경향을 보인다. 가장 현실적인 고통을 짊어진 이 인물은 오히려 감정적 몰입의 주변으로 밀려난다.


 작품 전체에는 무시하기 힘든 자기연민의 정조가 깊게 깔려 있다. 영혜라는 인물의 구축 방식에는 이 감각이 유난히 짙게 배어 있다. 상처받고 세계와 불화하는 예외적 영혼에 대한 동정과 찬미의 정서가 여러 인물의 시점을 빌려가며 내내 고양되는데, 그것은 지속적으로 미학적으로 묘사된다. 영혜에게 거의 모든 정서가 집중되고 그의 고통은 확대되는 반면, 그의 행위가 주변에 미치는 영향은 축소된다. 그와 비례하여 주변 인물은 영혜에게 자동 초점 기능이 탑재된 듯 복합성을 잃고 얄팍해진다. 결국 이는 구조보다는 한 인물의 비극을 감상하게 되는 자기 신화적 방향으로 수렴한다.

자신을 이해받지 못하는 특별한 존재로 상정하는 이러한 낭만적 자의식의 강조는 도취적 분위기를 형성해간다. 나는 서사의 핵심 엔진으로 작동하는 이것이 작품 전체를 치우친 감각으로 편향시킨다고 느꼈다. 이 때문에 작품 내의 고통은 현실의 복잡성을 사유하게 하는 계기로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


 이와 연결되는 맥락으로, 나는 이 작품을 폭력에 노출된 존재의 타자화에 대한 비판으로 읽는 해석에 다소 동의하기 어렵다. 실제 텍스트가 그렇게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혜는 타인의 시선 속에서만 형상화되고 해석된다. 다수 독자들은 이 점이 일방적 대상화의 폭력을 말한다고 인식한다. 그러나 내게 이 점은 작품의 도취적 낭만화 특징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요소였다. 폭력을 비판하려면 그것이 매혹적으로 소비되는 것을 방지하는 의도된 구조적 장치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그러한 거리가 확보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향유하고 미학적 가치를 부여하는 순간들로 포화 상태였다. 이는 역설적으로 여성의 수동성과 객체화를 재생산한다. 


그래서 독서 후 내게 남은 감상은 억압에 대한 통찰보다는 책임이 결여된 과잉 로맨티시즘에 대한 불편함이었다. 이 불편함은 고통과 예술, 여성 주체성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 의문에서 비롯된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