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너는 너의 속도로 내게 도착하였다
내가 (몇몇 부류의) 인용을 꺼리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지만, 오늘 말할 이유는 진정으로 지성적인 작업과 지성적으로 보일 뿐인 작업은 다르며, 어떤 인용은 때로 그 작업을 저해하기까지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나는 작가가 해낼 수 있는 지성적인 작업과 지혜로운 작업 또한 다르다 여기는데, 그러나 실토하자면, 때로는 지혜로움을 성취하기 위한 무엇의 열정이 내 동공에 침투할 때야말로 참을 수 없이 역겨움을 느낀다. 내가 말하는 지성이란 것이 대체 무엇이고 지혜는 무엇인지 면밀히 말하지 못하고 넘어감을 윤허해 달라. 다만 여기서 말할 것은 내게 글쓰기란 오로지 글쓰기이며, 그럼에도 에크리튀르에는 실은 자신으로만 이루어진 온전함이란 없으며, 때문에 앞의 문장은 즉시 고쳐져, '내게 있어 글쓰기는 오로지 글쓰기이며'라고 말하는 저 가엾은 과잉이 자기가 매단 올가미에 스스로가 걸리는 일이 필연임을 확인하는 일이 다시 나의 글쓰기라는 점이다. 물론 이는 새삼스러운 관점이 아니다. 콧잔등만한 사다리에 올라 내려다보는 자가 있다한들, 세상에는 그를 더 높은 사다리에 탄 채 굽어보는 자가 있으며, 그런 식으로 오른 자 위로 또 오르는 끝에는 "영원한 황금 노끈"이란 걸 느끼는 경지가 있다고도 한다. 여기까지의 나의 쓰기가 민병훈의 소설집 <<재구성>>의 감상을 내가 기쁘게 적기 시작할 것임을 드러내는 동시에 앞으로 제시할 나의 의견이 하찮다는 사실도 전해지길 바란다. 재차 강조하건대 "백성이 저절로 통나무가 되도다"라고 노자가 말했듯 내 소견은 하찮은 것이다. 아무튼 나는 통나무 부스러기 같은 인용을 할 것인데, 이는 내 솜씨가 미흡하기에 추하게나마 글을 치장하는 것으로서 이 소설집을 재밌게 읽었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더 알리기 위해서이며, 또 이 글의 빈약한 논리를 은폐하기 위해서이다.
"문학이란 아마도 다른 모든 예술 장르를 통틀어 가장 열려 있고, 가장 자유로운 장르일 것이다. 문학 속에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비톨트 곰브로비치의 이 유명한 말은 아마도, 라는 부사가 붙어있을지언정 문학이 가장 자유로운 장르라는 그의 확신을 표명하는 말일 테지만 가만히 살피자면 그래도 뜯어볼 만한 점이 있다. (원문이 충실히 옮겨졌다고 믿자면) 당장 눈에 들어오는 표현은 문학을 다른 모든 예술 장르보다도 "열려" 있다고 말한 점이다. 이 열림이 외부와 교통하는 문의 기능으로서의 은유라면, 내부에서 유출하기보다는 특히나 무엇이든 수용할 수 있기 때문에 곰브로비치가 문학이 가장 자유로운 장르라고 말하고 있다는 해석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의문을 품어볼 수도 있다. 문학을 가장 열려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이며, 심지어 왜 열려 있는 것인가?
문학은 가장 자유로운 장르다, 문학 "속"에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얼핏 보기에 자연스러운 이 두 문장 사이에는 어쩌면 보이는 것보다 깊은 해자가 파여 있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이를 왕래하려면 사이를 개방하는 문이 진실로 열려있어야 하며 튼튼한 도개교 또한 놓여있어야 한다. 생각건대 문학이 왜 열려 있는지, 또한 무엇이 문학이 열려있게 하는지에 대답은 단 하나다. 오로지 언어가 이것을 가능케 한다. 말장난을 하자면, 문학을 열려있게 하는 것은 언어인데, 이는 언어 스스로도 열려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서양회화의 색채와 서양음악의 음계를 비교 단위로 두자면 (음악과 미술을 함부로 들먹이는 까닭은, 둘 또한 그러하지만, "다른 모든 예술 장르"를 내가 검토할 역량이 없기 때문이다. 또 지금 나의 말은 곰브로비치가 하고자 하는 말과 멀어졌는데, 그 진의는 곰브로비치의 소설을 한 권이라도 읽고 나면 느낄 수 있다.) 생각건대 색채는 세속의 때 묻는 것으로서, 음계라는 각각의 음향은 수數처럼 순수한 것으로서 각자의 극한을 달린다. 이러한 말을 아무런 근거도 깔지 않고 감히 전개함을 눈감아 달라. 문학이 곰브로비치의 말대로 비교우위로서 가장 자유롭다면, 이는 다름 아닌 언어가 품은 가능성 때문일 것이며, 이는 색채의 무한함과 음향의 무한함을 동시에 지향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언어는 다루기에 따라 오물 덩어리가 될 수도 있고 한없이 순수해지려 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문학은 다른 장르를 통틀어 가장 열려 있고, 가장 자유로운 장르일 것이다. 문학 속에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언어 또한 그만큼 열려있다면. 이것은 곰브로비치의 의도를 망각하고 내가 재구성, 한 말이다.
때문에 만일 어느 작가가 문학 속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믿고 또 자신의 작품이 거기에 가닿아야 한다 욕망 한다면, 그러한 작가는 자신이 믿는 경계선(이 경계선은 물론 문학이라는 장르의 경계선이다)에 맞닥뜨릴 때까지 스스로가 지닌 언어를 전방에 뿜어내며 질주할 것이다. 더 지독한 작가는 질주를 넘어 폭주하게 되어, 그러한 작가들에게 종종 꼬리표로 붙는 이 수사, <장르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따위의 수식이 붙은 작가가 되곤 할 것이다. 이러한 작가군의 작업은 그들마다 정도가 어떠하든지 간에, 앞서 비유한 바를 따르자면 채색의 정도, 음계의 정도에 따라 "모든 것"을 믿는 신도들의 좌표마다 자리할 터이며, 물론 이들은 각자가 부지불식간에 설정한 스스로의 경계를 넘나들 뿐이지 서로가 사용하는 언어의 농담濃淡 때문에 우열이 나뉘지는 않는다.
이러한 작가군의 반대편에는 자연히 문학 속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의견을 취하는 일에 반대하거나 회의적인 입장들이 자리할 것이고, 방금의 표현이 부정적으로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나는 소위 리얼리즘, 모더니즘 작가군을 구별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지금 화제에선 중요하지 않기에 거두절미 하자면, 이러한 입장들은 물론 여러 갈래로 나뉘고 심지어 교차될뿐더러, 지금 제시한 모델이 모든 작가를 품어 구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순간에도 뛰어난 작가들이 이러한 얄팍한 그물을 빠져나가 구분의 바깥에서 서성인다. 그러니 지금, 단지 다양하다라는 말로 눙치고 넘어감을 이 지점에서 웃어 넘겨주길 바란다. 나는 오늘의 이야기를 위해 임의로 조작된 모델을, 게다가 극히 허술한 모델을 제시했을 뿐이다.
정말이지 곰브로비치의 작업과 한 터럭도 닮지 않은 민병훈의 소설집 이야기에다 무리한 이분법을 감수하면서까지 길게 끌어온 까닭은 그가 소설의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작가이면서도 그 속도가, 그야말로 그의 속도대로 즉, "나의 속도로 당신들에게 도착"[작가의 말]하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지 않나 싶어서다. 앞서 나는 가능성과 경계를 향해 달려가는 작가들의 행보를 질주, 폭주라고 표현했는데, 그렇게 일반화한 점을 또 면피하고 말하자면 그의 소설의 보폭은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 오히려 조금은 느린 속력으로 내딛는 걸음으로 보인다.
민병훈의 첫 소설집 <<재구성>>이 닿고자 하는 착지점은 선명하다. (내가 읽은 문학작품 중에 이렇게 친절한 작가의 말을 접한 적이 몇 없다) 문제는 이 착지점이 아마 본인과, 기호가 맞는 독자에게만 잘 보이고 대체로의 나머지는 어딘지 몰라 어리둥절할지도 모른다는 점이지만 이는 그의 잘못이 아니다. 작가의 말을 그대로 빌려오자면 그는 "소설에서 가능한/소설이라서 가능한"[작가의 말] 그것의 구현을 믿는다. 이 직접 발언이야말로 그가 가능성을 경계까지 향해 보려 하는 작가라고 내가 지시한 이유다. 그리고 그가 그리 말하는 까닭은 아마도 다른 예술, 심지어 (문학 장르 중 가장 자유롭다고 종종 승인받는)시보다도 소설만이 구현 가능한 영역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며, 그 영역은 다시 소설이란 단어로밖에 표현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소설, 소설의 소설, 소설적인 소설을 향하는 중에 있는 영원한 운동이다. 이 운동은 다시 정지돈 님의 말에 따르자면 "규정하기 힘든 감각과 사유로 뭉쳐진 덩어리, 다시 말해 총체적인 뉘앙스가 되는 것"[추천의 말]이다. 감각, 덩어리, 뉘앙스, 이러한 무엇으로 뭉친, 소설이란 연무를 이루는 구성 입자들은 아마 "무드와 물질", "궤도를 벗어난 위성의 무전과 주파수"[작가의 말] 따위일 것이다. 추천의 말과 작가의 말, 그리고 앞줄에서 인용한 표현의 질감에서 느껴야할 핵심은 민병훈 소설의 구동 원리나 정의 따위보다 그에게 소설이란 무엇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인 동시에 환원되지 않길 바란다는 점이다.
때문에, 설명을 많이 생략하고 계속 가보자면,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몇몇 소설가들이 그러하듯, 그는 (특히나 소설집에 실린 후기작으로 갈수록) 자신의 문장에게 아무것도, 때로는 대체로의 서사도 요구하지 않고 단지 전진하기를 혹은 후퇴하기를 요구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의 문장은 스스로가 흘려보낸 무질서에(물론 그러한 것은 없기에) 일말의 질서를 부과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서 떠올리길 요청한 작가들과 구별된다. 규칙적으로 무질서한 연기라니. 직각으로 스스로 굽어 흐르는 물이라니. 민병훈의 소설을 읽다보면 나는 간혹 그것들을 마주한 느낌을 받는다. 여러 수단을 동원해 시간과 공간을 정지시키고 지연시켜 서사의 공백 지대를 만들거나 문장의 마디를 끊임없이 분절시켜 문장 스스로가 신경증을 일으키는, 혹은 문장 자체에 물성을 입혀 독자 앞에 현현시키기를 꿈꾸는 작업 따위, 아니면 혼돈한 자체로서를 제시하는 삶의 재현은 그의 당면 목표가 아니다. 요컨대 그는 오히려 문장을 착실하게 전개하는 편이며 때로 문장에 비약을 일으키거나 비틀더라도 확실한 제약 하에 행하기에 나는 여느 모던한 소설가의 작업보다 일군의 시인들의 작업과 닮은 점도 느끼기도 한다. 그의 소설은 이해가 희박하다는 점에서 소위 난해하다는 평을 듣는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독서의 진입 자체를 어렵게 하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진전이 있다는 두 번째 구별점은 기껏 그의 소설로 진입한 독자들의 감상마저 놓치기 쉽게 만든다. 달리 말하자면 두 지점에서 독자층을 모두 끌어모을 매력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공원 벤치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이 흐려져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았는데, 공원 밖으로 달려가는 아이들에게서 그런 기미를 느꼈다고 혹은 바람에 흔들리기 시작한 잔디와 표지판과 농구 골대에서 폭우를 예감했다고 나중에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당장은 비나 우박이나 눈이나 옥수수나 뭐래도 내리면 좋을 것 같았다. (중략) 비가 내리지 않았다. 로이흐트 포이어 비니 모자를 쓴 학생들이 불안한 듯 흘깃거렸고 그들의 손에 들린 검은 봉지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들의 걸음과 흙바닥에 동그란 파문으로 형성되는 번짐이 입막음처럼 들리지 않았는데 그들의 계획에서 신경 써야 할 우연을 하나하나 묻고 싶었지만, 주황색 비니를 쓴 자가 가까이 다가와 주머니에서 워크맨을 꺼내 높게 들었고, 이어폰이 빠지며 들려온 음악에 잠깐 눈감았다. 눈을 뜨자 여전히 공원이었고, 벤치에 앉아 있었고, 누군가는 아직 오지 않았다. 누군가의 이름에 대해 생각했지만 너무 많다고 느껴졌다. 구남, 현 제이슨, 미영, 와타나베, 람, 바다리, 미진, 수 모리아...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방으로 머리를 가려봤지만 소용 없었다. 인조가죽으로 만든 가방은 빗물을 머금을수록 계속 무거워졌고 마치 벌을 서는 것 같았다.
<재구성> 중
굵게 표시한 곳은 내가 소설을 읽으며 리듬감을 느껴 표시한 구절이다. 물론 았, 었은 과거시제 선어말어미이기에 애쓰지 않아도 단어에서 반복되므로 리듬이 형성되지만, 재미있는 지점은 ㄱ으로 감기는 부분, (내가 굵게 표시하지 않은 부분까지 포함하여)특히 "예감했다"와 "눈감았다" 같은 부분이다. 물론 이런 구절들을 쌓는 일 모두를 철저하게 의도하여 구성했을 리 없지만, 때문에 더더욱 저자가 감각을 발휘하여 써내는 타고난 부분이다. 감히 여기다가 어쭙잖게 프로조디, 까지 가져다붙일 수는 없겠지만, 이러한 구절들은 소설 내부에서 음향으로 번져나간다. 이러한 음향은 앞서 말했듯 언어가 투명하게 열려있는 것으로 독자 스스로가 의식하지 못한 의미망 사이로 스며든다.
밑줄을 친 곳은 서술의 시제가 비틀린 점을 표시한 부분이다. 같은 문단에서, 비가 내리지 않았다, 라는 서술로 열었기에, 다음부터 관성으로 나아가며 서술되었다면, 즉 화자가 일반적이고 기계적인 시간을 경유해 감각했다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정도가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화자가 비가 내리기 시작한 시간을 건너뛰고, 즉 망각하고, 혹은 재구성하였기에, 그러므로 만일 독자가 예민하지 못했다면 저 구절에 이르러 그간 화자가 느낀 시간을 다시 검토할 수밖에 없다. (물론 소설 내내 숱한 알리바이가 있다) 여기서 화자가 느끼는 시간은 기계적 시간은 물론 아니고 베르그송 식일지도 모르기에, 너무나 유명한 구절을 이쯤에서 끌어오자면 "순수한 현재라는 건 미래를 먹어가는, 과거의 붙잡기 어려운 진행이다. 사실은, 모든 지각은 이미 기억이다." 때문에 저 그루터기 같은 문단에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한 문장을 쐐기로 박아 넣음으로써 소설의 시간을 현재인 과거로, 그러니까 이미 기억이 되어버린, 순간의 지각들로 채색된 공간으로 우리를 이끎으로써, 아래에서 마저 보겠지만 현상과 지각을 부정하는 말하기로 나아갈 수밖에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내가 채색이란 표현을 사용한 까닭은 물론 여기 동원된 언어들이 때 묻은 언어로 세속에 정박되는 데에 일조함을 지시하기 위해서이다. 그리하여 민병훈의 소설은 음향과 채색이 교직된 텍스트를 이룬다. 텍스트가 그 어원이 직물, 짜임새를 뜻하는 라틴어 textus에 있고 그뿐 아니라 textile과 texture의 기원도 텍스투스인 점을 상기하면 텍스트가 본디 잘 짜인 직물처럼 정교하고 질겨야 함은 당연하다. 민병훈의 문장은 벌거벗은 임금님이 입은 그 옷의 직물처럼 묘연한 것이 기이한데 다만 그 거짓말쟁이가 대령한 옷과 다른 점은 진실한 사람만 감동한다는 식의 헛것이 아니라 분명히 여기에 소설로 실재한다는 점이다.
문득 의아한 것은, 내가 어느 공원으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사실인데, 공원만 해도 수십 군데가 넘는 이곳에서 길을 잃은 것도, 길을 잃지 않은 것도 아닌 상태로 한동안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표지판에 적힌 공원을 가리키는 화살표와 기호는 무수한 사거리와 삼거리, 골목, 다리마다 사람들은 안내했고, 중앙 공원, 보드 파크, 근린 공원, 궁전을 감싸는 정원, 국립 미술관 뒤의 공원, 기술박물관 옆의 공원, 호텔에서 500미터 정도 떨어진 공원, 고등학교와 근접한 공원, 기념 공원, 공원으로 가장한 교회 놀이터, 공원 묘지, 도립 공원, 아무 이름 없는 공원들, 어떤 공원이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누가 기다려도, 누굴 기다려도, 오지 않거나, 가지 않거나, 못알아본다거나, 모른 체 한다거나, 몰라도 짐짓 아는 척을 한다거나, 무엇이든 가능한 것처럼. 공원에서 보기로 한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공원에서 보기로 마지막으로 만났을까, 처음으로 만났을까, 아니면 중요한 순간을 보냈을까, 사실 공원이 아니어도 괜찮지 않을까, 이것들에 대한 대답을 듣기 위해서일까, 다른 이유가 더 있을 것 같은데, 역시 가 보는 수밖에 없다고, 만나는 수밖에, 기다리는 수밖에.
(중략)
상상으로 이어질 관념을 생각했다. 기억으로 이어질 다른 기억을 생각했다. 합치, 조립, 자유 연상, 꿈, 행동, 형성에 대해 생각했다. 의사의 말이었지만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그라피티가 잔뜩 그려진 오두막에 자전거를 세우던 사람이 아는 체를 했다. 고개를 돌렸다. 능선처럼 조성된 구릉 꼭대기에서 아이들이 서로를 쫓고 있었다. 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제 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는지, 한 시간 전인지, 반나절 전인지, 어제인지, 해가 바뀌었는지 시간을 확인해 보고, 시간이 무의미해지는 순간에 대해 떠올리지 않았다. 순간이라기보다 공간으로 파악되는 현실감이 비현실적으로 공원에서 사람들을 몰아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이름에 대해 생각했지만 너무 적다고 느껴졌다.
<재구성> 중
소설의 한 부분만 더 살피자면 화자는 자신이 갈 곳을 알지 못하게 되며, 수많은 공원을 가리키는 수많은 지시기호에 둘러싸여 오히려 움직이지 못하며, 거기서 이러저러한 것들을 생각했으나 그러한, 상상, 관념, 기억, 합치, 조립, 자유연상, 꿈, 결국 그 모든 지긋지긋한 구동을 멈추고 부정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작중 화자에게 일어나는, 화자가 일으키는 종국의 일이 무엇인지는 소설을 직접 확인하시고, 여하간 그에게 일어나는 이 사태가 재구성이다. 기억의 재구성이며 망각의 재구성이다. 시간의 재구성이며 공간의 재구성이다. 그리하여 삶의 재구성이다. 기억의 천재 푸네스가 아니고서야(푸네스는 보르헤스 자신이 모델이라 말했다는 토막 상식도 곁들이며 말하자면) 무언가 기억함은 동시에 무언가를 선택해서 망각함이며 또한 그 역도 마찬가지다. 기억함이자 망각함이고 망각함이자 기억함이기에 "망각은 풍요화의 또 다른 일면이라 할 수 있다. 몽테뉴가 읽은 것을 서둘러 까먹는 까닭은 그것을 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피에르 바야르가 이렇게 말했듯, 화자는 여기서 망각함으로써, 그러니까 생각하지 않기, 떠올리지 않으려 함으로써 망각한 여백의 모든 부분을 역설적으로 되살리려, 다시 말해 재구성 하려 한다.
그러므로 앞선 문단에서 언급했듯 화자가 부정으로 말하며 그에게 계속해서 도래하는 현상과 지각들을 일소하는 수순으로 이행하게 되는 전개는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망각으로 모든 것을 재구성 하여야 하는 작중 화자에게 시간이란 감각으로만 지각되는 것으로서, 때문에 오로지 과거라는 결과로서만 공간에 펼쳐지고 그러하기에 자신의 말, 혹은 생각은 언제나 사건 후의 도착하는, 실패한 것이기 때문이다. 굵게 표시한 "순간이라기보다 공간으로 파악되는 현실감"이란 문장은 이 소설, <재구성>을 여는 첫 문단에 쓰인 문장인데 이것은 금방 말한대로 순간, 곧 즉발하는 현재를 느끼며 살아가는 일은 불가능하고 과거로서 펼쳐진 공간으로만 작중 화자가 현실을 파악할 수밖에 없다는 함의가 있으나, 인용한 부분에 이르러 마침내 이 문장조차 부정되어 소설 스스로를 흐트러뜨리고 무너뜨린다.
민병훈은 소설에서 자기가 모르는 영역을, 자신의 천재를 발휘해 본능과 영감으로 요술처럼 무언가를 일구어내는 작가가 아니고 어떻게든 조율하고 통제하여 결과를 이끌어나간다. 그런데 그의 작업에서 결과는 무엇인가? 그는 다름 아닌 바로 그것을 명확히 모른 채 해낸다. 그러하기에 그는 "먼저 모르는 사람이다."[추천의 말] 이 역설은 이렇게 완성된다. 자기 천재의 감각에 전적으로 의존한 것이 아닌, 그렇다고 장인의 탁월한 재주로 이루어지는 것만도 아닌, 그렇기에 작가의 말에서 그는 "죽음이라는 사건, 산책과 기계, 현재와 강박증, 영원한 미래 속, 실종, 유년기"라고 자기 작업의 윤곽은 말할 수 있으면서도 "뚜렷하게 뭔가를 알아냈다면 쓰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작업에는 스스로의 내부를 투시하는 엑스레이 같은 광선이 없다. 마치 마술사가 자신도 처음 보는 어두컴컴한 새로운 상자 안에서 비둘기를 꺼내는 일에 매번 능숙하게 성공하는, 여기에 그의 소설의 매력이 있다.
민병훈의 소설은 독자가 모호함을 느끼며 그 안을 헤매게 하지만 그 모호함은 안개, 그러니까 외부로부터 충전 받아 형성되는 막연함이 아니라 증기, 즉 서술자 자신이 호흡한 언어의 흐름을 타고 그 모호함을 껴안고 전진하는 증기의 모호함이다. 민병훈의 소설에서 독자가 겪는 현기증은 외인 없이(또는 숨겨진) 내연기관에서 피어오르는 언어의 증기가 매혹시키기 때문이며, 고로 그것들을 증기의 소설이라 부를 만하다. 그의 소설은 자신의 서사에서 보상이나 결실을 바라지 않고 묵묵히 다음으로 다음으로 나아간다. 초기작에선 그러한 "산책과 기계"[작가의 말]가 소재로서 전면에 드러났으나, 후기작으로 갈수록 소재가 드러나는 면은 줄고 소설 자신의 특성으로 나타난다. 즉 문장 자체가 "산책과 기계"로 내화된다. 마치 산책하는 기계로서의 문장이라고나 할까? 이러한 그의 행보는 소설집 안에서 꼭 읽어야할 소설 <원인>으로 봉우리를 이루고 <재구성>에서 다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원인>을 이 감상문에서 소개하지 않고 표제작인 <재구성>만 소개하는 까닭은 내가 그 소설을 감히 다루기 어려울뿐더러 부디 다른 독자들도 함께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정지돈 님이 민병훈을 두고 "지구에서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종류의 인간"이며, "멸종위기"라고 표현한 점은 나를 조금 슬프게 한다. 물론 어느 날 내가 서점에 갔는데 <<재구성>> 같은 소설집만 서가에 가득하다면 그것도 한번 고민해볼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한편 든다. 정말 이러한 작가는 멸종 위기인가? 생각건대 때로는 낭만이라 느껴질 정도로 이러한 부류는 지긋지긋하게 꾸준히 태어나는 것 같기도 하다. 딱히 거명하라고 하면 난처하지만, 절대량은 차치하더라도 소설이 소설 그 자체, 나아가서 자신의 삶조차 소설적으로 결곡하기를 바라는 이들이 곳곳에 있지 않은가 싶다. 이들은 세속이나 생활에 다소 무관심할지언정 예술을 위해 다른 무언가를 파멸시킨다거나 나아가서 자기 파괴를 행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위 예술지상주의자와는 다르다. 이들은 기성에도 아직 몇몇이 자리 잡고 있을뿐더러 그게 아니라도 제도의 거름망에 걸려들지 않아서든, 자본주의의 적소에 자리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든, 시대의 요구에 합치하지 않아서든, 그 까닭을 무엇이라 부르든 가시권에서 멀어졌을 뿐이지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지 않을까.
어쩌면 어떠한 소설을 읽는 독자의 한 종이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즉, "놀랍거나 환상적인 이야기, 몰입감 있는 서사적 구성, 아름다운 문장과 지적인 사유"[추천의 말]를 스스로가 십분 향유하고 있다 믿는 독자, 조금 더하자면 현실(이라 믿는 것)의 조악한 복제와 저자의 훈계에 기꺼이 복종하는 독자, 그들이 아닌, 너절하고 조잡한 아름다움과 포춘쿠키식 교훈에 무감하고 신기루에 냉소적이며 흥행을 위한 서사에는 관심이 없는, 입만 열면 아니오라고 말하고 자신의 눈으로 확인한 것마저 의심하기 바쁜, 그러한 기기묘묘한 독자야말로 멸종위기가 아닌가, 라는 생각은 여기서 개진하지 않겠다.
요르기오스 세페리스의 인터뷰에 따르면, 아테네의 해변에서 우연히 만난 앙리 미쇼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알다시피, 독자가 단 한 명 뿐인 사람은 작가가 아닙니다. 독자가 둘이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세 명의 독자'가 있다면(그는 '세 명'이라는 말을 마치 300만 명이라도 된다는 듯이 발음했지요) 그 사람은 진정 작가가 맞습니다."
나는 민병훈 소설의 독자 중 세 명을 알고, 두 명을 잘 알며, 그 중 한 명은 아주 정확히, 이 글을 타이핑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속도는 지향하는 곳으로 나아가는 물질을 측정한 값이므로 방향 없이 나아간 것의 측정값인 속력과 다른 개념이다. 민병훈의 소설들은 정처 없이 헤매는 듯 하지만 언제나 뜻하는 바로 도달하였다. 그런데 이 도달은 뜻하지 않게 불시착한 도달이다. 불안해 말고 나아갈 것이다. 너는 너의 속도로 내게 도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