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슬픈 소설이다. 슬프고 사랑스럽다. 이런 감상이 보인다. 그러나.
무엇이 아름답고 슬픈가? 되물었을 때 우리는 우리의 빈곤한 어휘와 상상력을 인정해야할 것이다.
이 소설집이 소위 말하는 모더니즘 계열에 속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리얼리즘 계열에 덜컥 넣기에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분명히 자본이나 시장에 불만을 품은 문학으로서, 서술이 파편화된다거나 사유의 전면성을 밀어붙여 저항하고 있지는 않은데, 그렇다 해서 시대의 단면을 드러내거나 특정 사회계층의 소외를 고발하고 권리추구를 대변함에 목표를 두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 저자가 겪은 일을 적당히 가공한 자전적인 소설인가?
아니다. 모두 틀렸다. 애초에 소설이란 그런 것들이 아니다. 아니라 믿는다.
이미 종종 언급이 되고 있지만, 이 소설집은 현실과 잠재(가상이 아닌)의 경계에서 깜빡이는 등장인물들과,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가 몰아치는 활력이 우리를 마침내 기이한 진공의 지점으로 끌고가는 데에 매력이 있다.
이 소설집은, 등장인물들이 현대적 배경과 확연한 전사를 품고 있음에도, 기벽이나 소량의 광증 따위를 발현하는 일로 세상의 잠재에 한 발을 걸치고 있다. (거기에 더하자면 죽음이 항상 우리 곁에 있다는 계고 정도가 거들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소설집이 제시하는 현대 배경과 그에 걸맞은 어조 때문에 자연히 어떠한 환상성의 침입을 배제하고 읽게 되지만, 등장인물들의 정념이 조금씩 투사되어 서서히 비틀리는 정경 때문에 이윽고 혼란을 느끼게 된다. 그러니까 소설집 전체의 기이하고 슬픈 비틀림은 인물들의 출몰지점을 추적하는 우리 시선의 진탕에서 기인한다.
그러하기에 “이런 게 니 머릿 속에 있는 것”인지 혹은 “진짜로 이런 새끼들을 만”났는지 (「이상한 소설」)묻는 것이 어리석은 질문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이 소설집의 매력을 발견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 소설이 보여주는 이야기가 우리가 겪은 어떤 경험과도 유사하지 않을 때, 혹은 우리가 “보고 싶은” 어떠한 경험과도 비슷하지 않을 때, 이를 몰이해한 채 버려두고 간다면, 이 소설집 뿐 아니라 다른 어떤 문학 작품을 수백 수천 쪽을 읽을 지라도, 우리는 사실 한 문장도 읽지 않았으며, 그저 우리가 보고 싶은 풍경에 끼워 맞추어 작품을 기형으로 비트는 지경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저자의 목소리에는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았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밑줄긋기에 빠졌을 때, 우리는 그저 나르시시즘에 빠진 지독한 독자들이며 그럴싸한 한두 문장을 잡아다 트로피로 전시하는 밀렵꾼에 불과하다는 것 또한 인정해야 할 것이다.
독자로서 우리는 관심 없는 소설을 버려두거나 재미없는 책은 언제든지 독서를 중지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바라는 낭만을 우리가 읽고 있는 문장에 개칠하기만 한다면, 차라리 작품을 읽지 않는 것보다 더 심하게 기만하는 일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지 않은 감각을 개척하여야 하며, 우리가 몰랐던 하나의 마음을 발견하여야 하며, 그것이 이 소설집 뿐 아니라, 문학작품을 읽는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마치 잡히지 않는 것을 만질 수 있는 여섯 번째 손가락을 달아주거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세 번째 눈을 달아주듯이.
그렇기에 소설쓰기가 스스로를 개호하는 방법이라 저자가 말했지만, 저자의 그 마음이 소설을 읽는 우리의 개호 또한 되어줄 수 있을 것이며,
우리를 감싸주는 그 투명한 막을 우리가 새로운 감각으로 느낄 때, 이 귀한 소설집을 아름답고 슬프며 사랑스럽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염두에 두기를 바라며, 이 아름답고 슬픈 소설집의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