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번 산 고양이>는 첫 문장부터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백 만년이나 죽지 않은 고양이가 있었습니다. 백만 번이나 죽고 백만 번이나 살았던 것이죠.’ 사람이나 고양이나 죽음이 한 번 뿐이라는 것은 초등학생, 아니 유치원생도 다 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첫문장에 이어 ‘얼룩고양이는 백만 명의 사람이 고양이를 귀여워했고, 백만 명의 사람이 그 고양이가 죽었을 때 울었지만, 그 고양이는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는 두 번째 문장은 독자에게 ’백만‘이라는 주문을 걸면서 이 특별한 고양이에게 빠져들게 한다. 한때 고양이의 주인이었고, 그 고양이의 죽음을 슬퍼했으나 결코 고양이의 마음을 사지 못했던 임금님, 뱃사공, 서커스단의 마술사, 도둑, 홀로 사는 할머니, 여자 아이의 이야기가 차례로 나온다. 비슷한 죽음의 에피소드가 반복되면서 이 고양이가 얼마나 도도하고, 신비로운지..한편으론 결국 죽는 것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된 얼룩고양이가 쓸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고양이는 드디어 자기만의 고양이, 도둑고양이가 되었고, 하얀 암고양이를 만난다. 자신의 개인기를 뽐내도 감탄하지 않는 하얀 고양이에게 끌려 그 곁에 붙어 있으면서 새끼를 낳고, 어느새 얼룩 고양이는 하얀 고양이와 새끼고양이들을 자기 자신보다 더 좋아하게 된다. 새끼가 자라 뿔뿔히 떠나고, 할머니가 된 하양 고양이가 조용히 움직임을 멈춘 날 백만 번이나 울던 고양이는 결국 하얀 고양이 곁에서 움직임을 멈춘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 이로서 백 만번이나 반복하던 이전의 죽음은 결국 거짓 죽음이었음을, 죽음이 거짓이었다면 삶 역시도 진실이 아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림책을 소리 내어 읽은 후, 나는 아들에게 물었다. 너는 이 책이 뭘 말하는 것 같아? 살려면 제대로 살라는 것 같아. 자기가 좋아하는 일 하면서. 엄마는? 난 사랑! 사랑을 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것 같아. 내가 사랑하는 것. 남이 나를 사랑해 주는 것 말고. 뒤늦게 들어온 딸에게도 묻자 한 문장으로 말한다. 자기가 진정 원하는 삶을 살아야 후회가 없다. (오, 우리 애들이랑 독서모임 해도 괜찮겠네!^^) 이 책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림책을 처음 읽은 아이가 할머니가 될 때까지 백만 번을 물어도, 묻고 또 물어도 답은 각자에게, 또 그 질문을 던지는 시기에 따라 다를 것이다. 이처럼 결코 가볍지 않은 내용이 어린아이가 그린 것 같은, 단순하면서도 담백한 수채화로 전달된다. 특히 표지부터 시작해서 얼룩고양이의 눈빛은 매번 푸르고 당돌하다. 암컷 고양이들의 구애를 받을 때 바위 위에 올라서 눈을 지그시 감고 포효하는 모습은 자신만만의 극치다. 그런데 내 마음을 울린 것은 마지막 그림, 하얀 고양이가 죽었을 때 울부짖는 모습이다. 정말 세상을 잃은 듯한 절망감이 느껴진다. 마치 이 얼룩고양이가 백만 번이나 죽었을 때 백만 명의 사람들이 흘린 눈물을 다 모아 놓은 듯이, 자신이 백 만 번이나 죽었을 때 미처 죽음을 슬퍼하지 못한 한을 이제야 다 풀어내듯이, 고통으로 절규하는 얼룩고양이 품에서 하얀 고양이는 평온한 잠을 자는 듯하다.
이런 게 사랑인가? 사랑이 클수록 아픔이 깊을 수밖에 없는, 후회 없는 사랑을 했기에 부활의 유혹을 포기할 수 있는, 하나 뿐인 죽음으로 죽음 이전의 삶을 완성할 수 있는. 이 그림을 계속 보고 있으니 세월호 유가족의 모습도 겹쳐진다. 바다에서 나온 아이를 안고 울부짖는 부모의 모습, 2014년 4월 16일, 부모는 아이 곁에서 조용히 움직임을 멈췄다. 두 번 다시 그 이전처럼 되살아 날 수 없다. 슬픔의 고통으로 죽은 영혼, 그 삶이 진짜라고 차마 말할 수 없다. 그들의 죽음이 진짜인 죽음이 되기를 바랄 뿐. 이 책을 통해서 백만 명의 사람이 품을, 백만 번의 질문을 나 스스로에게 다시 던진다. 너는 지금 누구의 것이냐고, 너는 지금 죽음이 두렵지 않을, 진짜 네 삶을 살고 있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