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endlessence님의 서재
  • 대도시의 사랑법
  • 박상영
  • 13,500원 (10%750)
  • 2019-06-28
  • : 23,162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꼭 특별해야만 할까?
여름 밤, 나의 아름다운 도시, 어쩌면 너 때문에
ㅡ 박상영 신작 <대도시의 사랑법>
* 이 글은 창비 서평단에 선정되어 기고하는 글입니다.

2019년에도 '슬픈 게이'의 타이틀이 어울릴까?
명랑한 퀴어, 발랄한 무지개, 평범한 퀴어함.
그러면서 지난 밤 게이클럽에서 쭉 들이킨 202010잔의 데낄라 냄새 가 나는 코 찡한 사랑법.
Don't be a Drag. Just be a Queen. 소설 속에서라도 말한 건 지키는 타입의 작가는, 박상영이 오랜만이다.

내가 작가 박상영에게 처음 반하게 된 작품은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이었다.
자신의 경험담을 적당히 먼 곳에서 관조하고, 그러면서도 관조를 애정 어린 응시로 고쳐 풀어내는 방식.
수레바퀴 굴러가듯 유려한 유머와 고인 눈물까지 쏙 빠지도록 슬픈 후일담을 동시에 담아내는 그의 문체는 누구라도 홀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가 그의 작품에 한창 빠져 있을 때즈음 창비가 나에게 신작 가제본을 건네며, 이보세요 박상영 신작이 나왔어요. 눈 뜨고 당장 읽어. 속삭이는 듯 싶었고 나는 자리를 박차고 우럭 한 점의 맛이 준 기대를 가득 품고 <대도시의 사랑법>을 읽어내려갔다. Of course, 박상영. 그는 나의 퀸이라고, 주절거리면서.
작가는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주인공과 규호와의 길고도 반짝이는 연애를 말한다. 지금은 망하고 없는 이태원의 한 클럽에서 처음 만난 둘의 연애담은, 술만 마시면 쓸데없이 끝내주는 '나'의 플러팅 기술로 규호를 집까지 끌어들이며 시작된다.

ㅡ 나를 보며 웃는 그의 맨질맨질한 이마에 조명이 반사되고 나는 이상하게 그가 나의 서울인 것만 같다. 아름다운 서울시티 시끄러운
음악소리.

ㅡ 그러거나 말거나, 너였으니까.
그래서나 그러나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러거나 말거나, 너였다고. 나는 그 말이 좋아서 계속 입 안에 물을 머금듯이 되뇌었다.

ㅡ 그거 아세요? 저도 진짜 사랑을 했답니다. 한번은 띠동갑의 늙은 운동권 아재를 만나 미국산 옷을 입는다고 혼난 적이 있고요, 근데 나는 또 그런 인간 좋다고 선물 사다 바쳐, 밥해 먹여, 집까지 쪼르르 달려가 애완견처럼 기다리고 다 했잖아.

소설에서 보여지는 '나'의 맹목적인 사랑에 대한 신념과 그것과는 관계없이 '나'가 푹 빠진 상대 규호에 대한 아름다운 마음, 그리고 슬쩍 드러나는 전 작품에서의 애인 이야기까지. 개인의 톡톡 튀는 후일담을 박상영의 문체로 엿보는 일은 환상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나'는 카일리를 몸 속에 가지고 있다. 카일리란 '나'가 자신의 병에게 지어준 독창적 이름이다. 이 소설에서는 그가 가진 슬픔에게 꽤 예쁜 별명을 지어주고는 '나'가 에이즈 보균자라는 사실을 은근히 드러내며 '나'와 규호가 나누는 사랑의 씁쓸함을 내보인다. 나는 여기서 궁금했다. '나'와 규호 간의 사랑의 씁쓸함을 꼭 이런 방식으로만 나타내야 했을까. 한국 퀴어소설의 현주소가 이러한 정형화된 프레임 안에서만 돌고 돈다면, 쉼 없이 생산되고 있는 퀴어문학이 과연 프레임 밖으로 나올 수 있을까.
지나간 사랑에 발이 묶여, 출국하는 규호를 붙잡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작가는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며 이야기를 완성했을까.

애써 명랑해지려 하는 게이 소년에게 돌덩이 하나를 얹어주며, 그래도 아직은 무게를 좀 잡으라고 강요하는 사회의 압박.
우리는 꼭 슬픈 사랑을 해야만 하는 걸까. 꼭 뭐가 잘 안 되고, 잘 되다가도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피가 나서 그 상처를 치료해야만 하는 사랑을 해야 하는 걸까. 우리의 사랑은 그래야만 아름다워지는 걸까.
박상영의 문체로 또 한 꺼풀의 사랑 이야기를 읽어내려간 것은 도심 속 분수와도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내게 던져놓은 '카일리'의 쇠사슬 같은 존재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프레디 머큐리의 성정체성을 드라마틱한 전개를 끌어올리는 데 이용한 것과 다르지 않게 보였다. 천의 자리 숫자가 2로 바뀌고도 20년 남짓이 지난 지금까지도, 성소수자의 이미지가 약점으로 대중매체에 걸려 팔리는 모습은 침이 마를 정도로 착잡하다.

한국에서 매년 개최되는 퀴어문화축제의 표어가 떠오른다. '우리는 여기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아직도 너무 몰상식인 의식과 함께 증명받는 것은 아닐까.
여러 이름들이 떠오른다. 나의 사랑하는 퀴어 친구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과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
우리는 서로의 사랑에 대해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다. 우리는 서로를 어떤 프레임 안에 가둘 자격도 없다.
그래서 나는 '나'와 규호의 아름다운 후일담을 너무 '게이틱' 하거나, '레즈비어닉'한, 소위 퀴어니즘에만 갇혀 있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퀴어는 어디에나 있다.
그들은 어디든지 갈 수 있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쇠사슬을 풀어야 하고, 뻔한 지뢰를 깨뜨려야 한다.
마치 사랑이 도처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