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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o98님의 서재
  • 지불되지 않는 사회
  • 김관욱
  • 16,200원 (10%900)
  • 2024-12-20
  • : 1,432

노동자로 이 땅에 살면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밥벌이의 힘듦을 여실히 느끼는 나는 저자가 생각하는 한국 노동 일면은 어떨지 궁금했다. 그리고 다들 나처럼 힘들게 돈 버는가? 도 궁금하고 ㅋ

의사이자 인류학자인 그의 독특한 이력이 낯설었고, 나름 기득권으로 누리고 살았을 그가 왜 이런 의구심과 고뇌에 빠지게 되었는지도 궁금했다.

첫 장부터 나를 사로잡는다. '주옥같은'을 여기에 쓰긴 안 맞지만.. 하나같이 다 중요한, 의미 있는 말들을 하셔서 밑줄 친 곳이 너무 많다. 뭐랄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딱 알맞은 표현으로 정리해 준 기분이랄까?

-어떨 땐 임금이란, 실적의 총량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견뎌낸 고통의 총량에 대한 위로금이 아닐까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게 성실했던 그도 어머니께 평소 자신의 '도구'로 전략했다고 말했다. 일단 9만 원을 입금하면 무조건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할 도구 말이다. 작업장에서 그는 '버튼을 누르면 움직이는, 피치를 올리면 더 빨리 일하는 게 당연한 기계'였다. 이 또한 기업의 선택일 테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처럼 고된 업무라 할지라도 그것이 생계를 위한 '밥줄'일 수 있다. 절망스러운 건 그곳 말고 더 안전하고 편안한 좋은 직장을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일 것이다. 그의 선택지에는 애초에 모욕적 상황을 회피할 대안이 희소했을지 모른다. . 그가 고된 일을 그만두지 못했던 또 다른 이유 말이다. 그는 휴식을 권하는 가족의 만류에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안 나가면 다른 사람이 고생한다"

-전주희 연구원(서교인문사회연구실)은 회사가 총알 배송을 위해 최적의 동선을 설계할 때 "노동자들이 하루의 피로를 씻어내고 다시 회복된 신체로 다음 날 일할 수 있는 상태"가 될 수 있는 작업량은 계산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고용이 불안정한 노동자들끼리 알아서 감수해야 할 손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임금이 지불되지 않는 노동이 있었다. 이를 통상 부불 노동이라 부르는데, 가장 대표적 예로 여성의 가사노동, 돌봄 노동, 재생산 노동을 꼽는다. 즉, 남성 노동자의 원활한 노동을 위해서는 그를 뒷받침하는 여성의 '숨은 노동'이 필수적이지만, 그러한 여성의 노력은 지불되기는커녕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도 못한 채 마치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규율로서의 무금임 상태"로 여겨져 왔다.

-노동이 지불 받아야 할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로 그것이 '타인 중심성'을 지녔기 때문이라 지적한다. 즉, 타인을 배려하고, 스스로 헌신하며 동료에 대한 애정을 지켜가는 것은 지불 받아야 할 가치로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는 소위 돈이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기업을 고 장덕준 씨처럼 이런 타인 중심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으면서 성실한 사람을 고용하길 원하지 않던가, 그들도 동료애 등 이런 보이지 않은 배려가 노동생산성과 직결됨을 알고 있기 때문일 테다. 그리고 그 능력이 아주 오랜 기간 공짜로 사용되어왔다는 사실도 말이다.

-자본가들은 애초에 공짜였던 공유재를 빼앗아 자신의 사유재로 삶고, 평민들의 사유재였던 노동력을 마치 공유재인 양 제값을 치르지 않고 마음껏 사용한 셈이다.

-여성에게 청소 노동이란 언제나 마음껏 써도 되는 공유재라 생각해서일까?

-김영선은 과거 직장에서 오로지 근면 성실한 노동자를 원했다면, 오늘날은 성과를 경쟁적으로 '뽑아낼' 노동자를 요구한다고 지적한다. 성실함은 기본이고, 남보다 뛰어난 실적을 보여줘야 한다. 이런 시스템 안에서는 동료애가 아닌 철저한 동료 간 경쟁이 노동의 원칙으로 자리 잡는다고 본 것이다.

-노동자가 어떠한 고통을 인내하며 실적을 맞추고 있는지 모른 채 높은 성과에만 주목

-얼마나 아프면 유급휴가, 병가를 받을 수 있을까.... 중략... 병가를 허락받는 것 자체가 힘든 현실이었다. 어렵사리 아픈 몸을 인정받아도 거의 예외 없이 무급휴가였다. 정말로 노동자는 바쁜 업무 앞에서는 아파선 안 되는 존재일까.

-이미 많은 노동자가 아픈데도 불구하고 출근해서 상사의 눈치를 보며 참고 일을 하고 있는 상황을 꼬집니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는 '프리젠터즘'이라 불리는 현상이다. 아파도 출근해야 하는 것이 디폴트인 현실의 부당함을 지적한 용어다.

'타인 중심성'을 가진 노동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그러나 그 타인 중심성을 가져야지 회사가 돌아간다. 내가 자주 답답하게 여겼던 것을 여기에서 답을 찾았다. 후배는 나에 비해 약았고, 일을 덜 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미뤄두는데 익숙하지 않은 내가 그의 몫일 될 수 있는 것까지 하고 말 것이란 것을 알았던 거다. 나는 좋게 말하면 너무 성실하고 열정적이라서, 나쁘게 말하자면 덜해도 되는데 구태여 하는 사람인 것이다. 결국 내가 더 하고 마는 상황은 내가 원하지 않았지만 '타인 중심성'을 가진 노동이었던 것이다.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나는 내가 더 많이 하는 것 같아서 답답하고 억울하고.. .샌드위치 날마다 휴가를 쓰는 그가 얄미웠다. 그는 내가 아이들 일정에 맞추어 휴가를 써야 하는 것을 알았기에 샌드위치 날 휴가는 당연히 제 것인 양 사용한 것이다. 그날의 일은 공유제로 자신의 일할 게 아니라 내가 해야 한다는 것인 거다.

이제 노동자는 성과를 경쟁적으로 '뽑아낼'수 있기까지 해야 한다. 노동자의 고통은 안중에 없다. 그저 성공적인 성과만 있으면 될 뿐. 하지 않아도 될 동료 간 경쟁을 하고 마음을 다친다. 더 약은 자가, 더 못된 자가 승리자다. 그렇지 못하면 이용당하고, 남용될 뿐이다.

감기로 근 한 달을 골골골 하고 있는 내게 어느 날 동료가 휴가를 쓰는 게 어때?라고 했다. "난 독감도 아닌데 어떻게 휴가를 써~" 하고 내가 대답했다. 차라리 '독감'이라면 대놓고 휴가를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말 얼마나 아파야 휴가를 쓸 수 있을까? 프리젠터즘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상황, 아파도 출근해야하는 것이 디폴트인데 어떻게 몸이 아프다고 휴가를 쓸 수 있나 말이다. 여기에서 도덕적 해이는 누구의 것인가? 몸이 아픈 노동자일까, 몸이 아플 때까지 실적을 종용한 회사일까, 병든 시민들보다 재정상태만 신경 쓰는 정부일까. 도대체 정말 얼마나 아파야 휴가를 쓸 수 있을까? 언제쯤이 되어야 내 휴가가 진짜 내 휴가로서의 역할을 할까?

내게 일이 '소명의식을 갖고, 내 삶의 가치를 더욱 빛내줄 무언가!'라고만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현실적으로 볼 때 밥벌이의 역할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일에 매달릴 수 밖에 없지 않나 말이다.

-한국의 노동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밀려오는 느낌은 '숨가쁨'이다. 벅차고, 쉴 틈 없고, 그러다 다시고, 다친 것을 무시하고 또 일을 하고, 뉴스를 통해 주변을 통해 그렇게 일을 하다 쓰러진 사건들을 남의 일처럼 흘려듣고 지나가는 일상들, 너무 고된 일도 계속 일거리를 받기 위해 참고 일해야 하는 사람들의 땀과 신음. 그렇게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인내심이 암묵적 계약 조건이라 믿고 버티는 사람들.

저자의 말처럼 우리 나라는 노동이 다수의 사람에게 노력의 대가가 제대로 지불되는 사회는 아닌 것 같다. 어려운 문제이지만, 일의 가치나 소명만큼이나 밥벌이라는 문제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어서 노력의 대가가 좀 더 제대로 매겨지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플 때, 아프다고 말하고 쉴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이땅에서 일하는 모든이에게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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