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도에 묻히다’를 처음 손에 잡아들고 읽기 시작했을 때 첫느낌은 너무나도 술술 잘 읽힌다는 것이었다. 이 책이 주로 이야기하는 인도네시아 등 적도라는 공간은 너무나도 생소했고, 조선인 군무원 이야기라는 것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지만, 이 책은 단순히 머나먼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닌 듯 느껴졌다. 오히려 내가 직접 이 이야기들을 들으러 찾아다니는 저자들인 양 책에 몰입하게 해주었다.
그것은 아마도 책의 표지에 적혀 있는 ‘역사 르포르타주’라는 설명대로일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들었던 느낌은 내가 직접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삶을 듣고 있다는 것이었다. 최근에 역사학계에서는 방법론적으로 ‘구술사’라는 방식이 채용되고 있지만, 그것이 재현될 때에 이러한 ‘직접적’ 느낌을 주지 못한다. 논문으로서 분석을 목적으로 하다보니, 연구자들이 겪었을 그 현장성, 감정들은 오히려 사장되고 만다. 하지만 그 현장성, 순간순간의 느낌들이야말로 후세에 전해져야 할 또 한면의 역사이고 기록이지 않을까? 이 책의 저자들은 그런 섬세함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고 단순히 술술 읽힘이나 생동감으로 이 책의 장점이 끝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전문 역사연구자를 꿈꾸는 나로선, 저자들이 보인 노력이 책의 곳곳에서 느껴지는 것 또한 큰 배움이 되는 것이었다. 적도에서 활동했던 조선인군무원, 이들은 잊혀진 존재들이었다.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피식민지인이기도 했지만, 일제의 전쟁에 동참한(혹은 동원된) 전범이기도 했고, 하지만 또 그곳에서 식민지 지배의 부조리를 최극단으로 체험하면서 조선독립을 꿈꾸었던 그들이지만, 그들은 일본에서도 해방이후 남한사회에서도, 그리고 적도에서도 모두 잊혀진 존재였다. 그럼 그들을 찾아내 발굴했다는 점, 그리고 그들이 지녔던 다층적 측면들을 어느 한 측면에 치우침 없이 추적하고 재현하고자 노력했다는 점이, 역사학자를 꿈꾸는 나에게 발로 직접 뛰면서 발견하고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을 복원하는 작업에 대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조선인 군무원들의 다층적 측면을 찬찬히 살폈던 점, 특히 일본 군인들은 조선인 군무원의 이름을 기억 못 하고, 조선인들은 인도네시아인들의 이름을 기억 못 하는, 반대로 인도네시아인들은 조선인을, 조선인은 일본인을 또렷히 기억하는, 식민지 지배 속 민족적 차별이 체화되어 있던 그들의 단면을 보여줬다는 것은 최근 연구들이 ‘친일’ 혹은 ‘대일협력’이라는 개념으로 이러한 문제들을 탐구하는 것에 선구자격인 시각을 담지하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또 어떤 면에서는 배경식 선생이 ‘기노시타 쇼조,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에서 그려냈던 이봉창의 모습이 조선인 군무원 그들에게도 오버랩되는 느낌을 주기도 했다. 식민지 지배 속에 젖어든 조선인들은 그 안에서의 출세(생존)을 꿈꾸게 되지만, 올라가려고 하면 할수록 피식민자로서의 한계와 차별을 직시하게 되고, 다시금 생존을 위해 결국은 자신이 협력했던 일본제국에 대해 저항의 길을 걷고 말았던 이들.
어쩌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성공을 하고 싶어 사회의 논리 속에서 열심히 살아가지만, 계속해서 그 사회 논리에 배반당하고 낙오자가 되어가고 있는 우리네들 삶 조차도 그들과 닮은 면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