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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스푼의 시간
  • 구병모
  • 10,800원 (10%600)
  • 2016-09-05
  • : 5,178

좋은 소설은 시간을 일그러뜨린다. 구병모 작가의 <한 스푼의 시간>도 그랬다. 아들의 ‘죽음’에서부터 배송된 로봇 은결의 이상한 시간으로 시작한다. 은결의 시간은 뭔가 다르다. 로봇이니까 다른 게 당연하지, 라는 게 아니다. 은결의 감정이 아주 느리게 진행된다는 것이 다르다. 인간이라면 처음부터 갖고 있었던 (응당 갖고 있었을 거라 생각했던) 감정의 회로에 불이 켜지는 과정을 면밀하게 보여준다.

 

시호의 눈가에서 불규칙하게 난반사되는 눈물이 은결의 인공신경을 파고든다. 일단 하품 때문은 아닌 것으로 보이는 이 눈물이 슬픔 또는 아픔, 외로움, 그리움, 기쁨, 어디에 해당하는지 은결은 자신이 보유한 상과 일일이 대조해보지만 그 무엇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그의 연산은 포연을 닮은 안개 속을 헤맨다. 난투가 벌어진 듯 배열이 뒤섞이다 희미해지고 이윽고 투명해지는 0과 1들. 감정과 무관한 거라면 그저 만취 상태일 수도 있고, 때로는 그 모두에 해당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눈물은 어떤 생리작용보다도 해독이 어렵다. 은결의 인공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마을에 한 아이가 태어나고 누군가는 죽고 결국 은결의 곁에 있던 주인 명정도 떠나가고 은결이 스스로 죽음을 택하기도 했다가 먼 훗날 새로 태어난 한 생명을 돌보는 일. 태어났다 지워지고 다시 생기고 하는 순환 속에서 ‘하겠다’와 ‘해보겠다’의 차이에 대해, 무너져 내린다는 느낌에 대해, 단어 하나하나를 음미하면서 은결은 자신을 자극하는 수많은 감정을 손끝으로 더듬더듬 짚어나간다. 그런 은결의 담담한 말투와 행동을 지켜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울컥하는 때가 있다. 그것은 읽고 있는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매일매일 느끼고 있었던 감정을 가만히 그리고 천천히 생각해볼 수 있었던 적은 거의 없었으니까. 새삼, 감정을 느끼고 있는 스스로가 고마워진다.

 

“무너져 내린다는 느낌은 어떤 것입니까.”

(중략) 무너진다는 건 결국 그 현상을 대하는 사람의 슬픔이나 분노에 좌우되는 게 아닌가. (중략)

“누군가 죽으면 옆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시호 님이 그랬던 것처럼 울거나 소리치고 무너지는 거군요.”

 

-사람이 무너지면 무너진 그 사람이 죽나요. 아니면 옆에 있던 사람이 숨을 거둡니까.

-그건 사람마다 다르겠지, 둘 다일 수도 있고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사람이 건물과 다른 건 부서져도 대강 이어 붙일 수 있다는 점일까, 다시 일어난다는 점일까. 나는 아내가 떠난 뒤 무너졌지만 죽지 않았고, 아들을 그렇게 보내고 나서도 무너지는 줄 알았지만 역시 이렇게 살아 있는데 두 번째는 아무래도 네가 여기 왔기 때문이겠구나.

 

책장을 덮고 나자, 아주 긴 세월을 살아낸 느낌이 들었다. 먼 우주에서 한 스푼에 담긴 아주 작은 시호와 준교, 세주와 명정의 시간을 들여다본 느낌이 들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먼 곳에 존재하는 눈 내린 작은 마을인 듯, 자세히 살펴봐야 볼 수 있는 물방울 속 환상의 거리인 것처럼. 결국 한 사람의 인생은 소설에서 말하듯이 모든 것이 축약된 세제 한 스푼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 한 스푼은 ‘고작’ 한 스푼이 아닐 것이다. 녹아버리지만 물속 전체에 퍼져 녹아 있는, 한 스푼이자 전부인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일 것이다. 그 작디작은 세제 한 스푼의 이야기를 보면서 가슴이 아릿했다가도 눈물을 슥 닦으며 개운하게 미소 지을 수 있었던 것은. 그래, 살아 있지, 우리는 살아 있구나. 결국, 이 작은 세상에서 아등바등 숨 쉬고 있는 스스로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소설이다. 나를 포함한 숨 쉬고 있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기를, 소설에 다 녹아가면서도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여기에 어떤 말을 더 덧붙여야 할까.

그냥, 단어들과 함께 <한 스푼의 시간>이라는 물속에서 녹아내리면 된다. 단지 그뿐, 다른 말은 더 필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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