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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산요수님의 서재
  • 라온의 아이들
  • 김혜정
  • 10,710원 (10%590)
  • 2020-12-20
  • : 494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상의 섬 ‘라온(즐거운 곳이라는, 반어적 의미의 지명)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을 통해 극한 상황 속에서도 사랑하고 연대하는 아이들의 우정과 사랑, 부당한 힘에 맞서고자 하는 의지를 담은 작품.

 

이 소설은 역경에 처한 아이들에게 우리가 너희들을 모두 기억한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기억의 힘을 환기하는 효과가 있는 작품이다. 역사적인 사건을 재현하는 방식이 아닌, 고난을 딛고 일어서는 이야기로 재탄생된 서사라고나 할까. 잊어서는 안 될 어떤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고 상징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더욱 묵직한 감동을 안겨 준다. 

 

'라온'이라는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나 불합리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 우선 아이들의 캐릭터가 흥미롭고 사건 전개가 역동적이며, 문장이 수려해서 강한 흡입력이 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1년 전 나와 친구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이 섬 ‘라온’에 왔다. - P6
눈을 떴을 때 사방이 검푸른 빛이고 솨아솨아 파도 소리가 들렸다. 조금 지나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여기 좀 봐, 얘 깨어났어. 어? 얘도, 쟤도……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얼마쯤 지나자 뭔가가 몸을 포근히 감싸는 걸 느꼈다. 달빛이었다. 달빛이 자아내는 분위기 때문에 아늑하고 신비로운 곳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라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다시 잠들었다가 깨어났을 때는 누군가가 내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있었다. 얜 갈비뼈가 부러졌는걸. 얘는 팔이…… 여기로 오는 도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대부분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다. 무애는 오른쪽 가슴을 깊이 찔렸고 고얼은 왼쪽 팔꿈치가 으스러졌다. 시형은 양쪽 무릎을 다쳤고 주안은 정수리가 깊이 팼다. 마로는 가벼운 타박상을 입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통증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난 상처가 아니면 다친 데를 알 수 없었다. 갈비뼈가 부러진 나와 팔이 부러진 고얼의 경우가 그랬는데, 의사 첸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다친 것조차 몰랐을 거였다. 무엇보다 우리 모두 기억을 잃어버렸다.
그날 이후 우리는 이 섬의 이방인으로 살아왔다.- P7
지명의 뜻이 즐거운 곳이라는 라온. 이 섬은 지구의 어디쯤에 있는 섬인지, 대체 우리는 왜 여기에 온 것인지, 우리를 데리러 온다는 사람은 왜 안 오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에 대해 알려고 해서도 안 되고 불만을 토로해서도 안 되었다. 우리는 고작 열여덟 살 안팎인데 말이다.- P7
우리는 그 구조물에 대해 계속 이야기했다. 규모로 보나 바닷속에 있는 것으로 보나 예사롭지 않은 거라는 추측이었다. 마로가 본 아이 말고도 누군가가 더 있을 거라는. 그 구조물은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는지, 신입들은 어디서 오는지, 의혹은 또 다른 의혹을 낳았다. 우리는 점점 더 큰 의혹에 사로잡힌 채 기억을 되찾을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 P58
"그게 우리가 타고 온 배야. 우리가 타고 있을 때 가라앉았대. 주안이가 기억해냈어."
"그게 정말이야?"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질문이 이어졌다. 어떻게 된 거냐. 우리가 그 배를 왜 탄 거냐. 나는 주안에게 들은 대로 차근히 설명했다.
"그래? 근데 그 배가 왜 가라앉았지? 암초에 부딪쳤나? 무슨 습격을 받았을까?"
B구역 대표가 물었다.
"풍랑이 셌다니까 그래서일 수도 있겠지. 근데 중요한 건 배가 가라앉기 전에 우리하고 우리를 인솔하는 사람들하고 크게 싸웠다는 거야. 의견 충돌 정도가 아니라 큰 싸움이었다면 우리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겠지."
"기주 추리력 하난 알아줘야 해."
D구역 대표가 엄지를 들며 말했다.
"배가 가라앉았으면 구조대가 와야 하잖아. 근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
- P104
멀리 파도가 굽이치며 내달았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바다는 알고 있을까.
해안가를 벗어나 무작정 걸었다. 얼마쯤 걷자 오르막길이 나왔다. 나뭇가지 사이로 하늘이 열리고 햇빛이 모래알처럼 쏟아졌다. 풍경은 이상할 것도 없는데 새 울음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주변이 점차 무채색으로 변하면서 내 몸마저 휘발되는 느낌이었다. 바위에 걸터앉아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차차 호흡이 안정되고 몸도 이완되었다. 아득한 기억 속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고얼이 배가 이상한 곳으로 가고 있다, 배를 세워야 한다고 소리쳤다. 이내 아이들이 동요했다. 마로와 눈이 커다란 아이, 고얼이 앞장서서 우리를 인솔하는 자들과 격한 언쟁을 벌이다가 결국 몸싸움으로 이어졌다. 무슨 영문인지 배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우리는 고얼의 지시에 따라 서로 도우며 가까스로 배에서 빠져나왔다.- P138
이제 우리는 또 하나의 길 위에 서 있다. 무엇이 우리를 이끌었든 그건 우리의 의지가 건져 올린 결과였다. 이제 그 길 위에서 최선을 다하는 일만 남았다. 앞으로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어떤 것이든 그 안에서 뭔가를 찾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바닥을 만난다고 해도 다시 기어올라야 하겠지. 그런 뒤에야 비로소 또 다른 세계에 도달할 거라는 데 의심이 없었다.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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