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죽었다.'라 말하며 초인이 되라고 강하게 말하는 철학자 니체! 강해보이는 그는 아픈 사람이었다. 젊어서 교수가 되었기에 연금을 받으며 집필에 몰두할 수 있었으나, 두통에 시달려야만했고, 매질받는 말을 몸으로 끌어앉으며 쓰러져서는 10년 동안 정신병원에 정신적 사망상태에서 살아야만했다. 그에 대한 애처러움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니체 읽기의 혁명'이라는 책에 다시 손이간 것도 이때문이다. 니체의 글을 읽으며 아픈 그를 위로하고 싶었다.
니체의 말은 강하다. 그에 말에는 힘이있고 시대의 금기에 주저하지 않고 맞서는 당참이 있다. 중세를 지배했던 신은 죽었다고 말하는 용기가 있다.
"그런 신이라면 사라져라! 신이 없는 것이 차리리낫다. 차라리 자신의 손으로 운명을 개척할 일이며, 차라리 바보가 되고, 차라리 나 자신의 신이 될 일이다."-97쪽
동양의 불교를 창시한 싯다르타는 신이 아니다. 먼저 깨달은 자일 뿐이다. 그래서 '부처'라 부르지 않는가! 그런데, 서양의 종교는 유일신을 상정한다. 그는 절대자이다. 그리고 절대 복종을 강요한다. 이러한 신에 대해서 니체는 '그런 신이라면 사라져라! 신이 없는 것이 차라리낫다.'라고 당차게 외친다. 사실 신이라는 존재도 인간의 창조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니체는 한다.
"인간은 삶이 무서워서 사회를 만들었고 죽음이 무서워서 종교를 만들었다."(허버트 스펜서)
"신이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신을 만들었다."(포이어바흐)
"신이 종교를 내려준 것이 아니라 사람이 종교를 만든 것"(니체)-138쪽
인간은 그 누구도 신을 본적이 없다. 보지도 못한 신이라는 존재를 인간은 어떻게 알았을까? 그 원초적인 질문 속에서 종교의 등장, 신의 탄생을 설명할 수 있다. 허버트 스펜서, 포이어바흐, 니체라는 걸출한 철학자들이 말하듯이, 신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요청된 존재이다. 니체는 이러한 신의 존재를 직시했다. 그리고 신의 노예이기보다는 삶의 주인이고자했다. 그래서 '신은 죽었다.'라고 외치며 위버맨시(초인, 극복자)가 되라하였다. 니체는 신의 노예로서의 삶을 거부한 진정한 극복자였다.
19세기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신을 마음속에서 죽이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죽은 신을 부여잡고 그 존재에 의탁하며 노예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노예적 사람들은 삶의 허무를 견뎌내지 못하기에 무의미를 없애려고 거짓 의미를 부여한다. 가령 자신이 현실에서 고통당하는 이유가 죄 때문이라 생각한다."-193쪽
목사의 아들 니체는 기독교의 원죄론을 실날하게 비판한다. 어디 기독교 뿐이랴! 불교 신도 중에서도 오늘의 고통을 '전생의 업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얼마나 노예적 생각에 점겨 있는가! 삶의 허무를 견뎌내지 못하고, 신이라는 존재에 의탁해서 현실의 고통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그 고통을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바로 낙타의 삶이다. 자신이 짊어진 짐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주인을 위해서 무거운 짐을 지고 뜨거운 사막을 건너는 낙타의 삶을 우리는 살고 있다.
니체는 '노예적 사람'에게 외친다. 극복자(위버맨시, 초인)가 되라고... 종말인(최후의 인간)이 되기보다는 짊어진 짐을 벗어 던지고, 사자가 되고, 아이가 되라고 외친다. 그것이 바로 극복인! 초인이다.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살인을 합리화시키기도하는 인간 말종이나 종말인들은 니체의 울부짖음에 귀기울여야한다.
손석춘은 니체에 대한 오해도 풀어주었다. 보통 니체가 젊은 시절 사창가에 갔다가 매독에 걸려 일생을 고통속에서 살아간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매독균이 뇌에 들어가 천재적인 업적을 이루기도한다. 그리고 매독성 치매로 진행되어 10여년 동안 정신병원에서 고통속에서 살다 죽어야했다고 말고 있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니체는 뇌종양을 알았다고 한다. 니체에 관한 자료를 더 찾아보았더니, 뇌수막종양가설, 유전성 다발성 뇌경색성 치매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 이유는 매독 환자에게 나타나는 신체적 징후가 니체에게 나타났다는 기록이 없으며, 매독 발병 후 보통 2~3년 내 사망하지만 니체는 투병기간이 무려 11년이라는 사실이 그 근거이다. 이 사실을 알고 니체에게 미안한 감정이 밀물처럼 다가왔다. 얼마나 고통 속에서 괴로워했을까? 더욱이 자신에 대한 잘못된 사실이 진실로 받아들여졌음을 니체가 안다면 저승에서도 편히 잠들지 못했을 것이다.
저자 손석춘은 니체를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이 책 곳곳에 세심한 배려를 숨겨 놓았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순우리말을 찾아 사용한 것이다. 한예로 밑절미와 같이 우리가 미처 몰랐던 단어를 사용하였다. '밑절미'라는 단어를 찾아보며 '밑거름'과 비슷한 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우리가 사용하지 않으면 사라질 수도 있는 우리말을 사용하여 새생명력을 불어 넣는 일은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었다.
손석춘은 니체의 철학용어를 쉬운 말로 적절하게 다시 번역하였다. '최후의 인간'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긍정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그러나, 니체는 '최후의 인간'을 긍정적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 긍정적 의미의 말을 부정적으로 이해하고 책을 읽을 때 너무도 괴리감이 첬다. 손석춘은 이를 '종말인'으로 번역했다. 이밖에 '초인'을 '극복인'으로 번역하여 니체의 철학에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러한 번역어를 접하면서 니체의 철학이 보다 가깝게 나에게 다가왔다.
니체의 사상중에서 '영원회귀'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론이다. 지금의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이 생각은 불교의 윤회사상을 떠올리게한다. 발전론적 역사관에 길들여진 나로서는 순환론적인 '영원회귀'를 주장하는 니체의 의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물론, 지금 이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할지라도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라는 의도에서 '영원회귀'를 말했다는 설명을 듣고 어느 정도 니체의 의도를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철학자가 불교의 윤회사상이나, 비과학적인 우주론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주장을 한것은 여전히 이해하 되지 않았다.
하지만, 손석춘은 니체 철학이 과학적으로 증명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다중우주'와 '평행우주'가 니체의 영원회귀와 '친화적 가설'이라 주장한다.
"니체 사후 지금까지 발전해온 우주과학으로 모든 것이 영원히 되돌아온다는 영원회귀의 철학적 사유는 새롭게 조명될 수 있다."-147쪽
우주에 대해서 인류가 알고 있는 지식보다 알지 못하고 있는 지식이 많기에 니체의 '영원회귀'가 과학적으로 입증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먼 미래에 과연 니체의 '영원회귀'는 입증될 수 있을까? 아니면 철학적 가설로만 남아 있을까?
니체는 완벽한 인간이 아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새롭게하며 상승하고자했던 사람이다. 평생을 두통에 시달렸고, 루 살로메에게 편지를 보내며 사랑을 갈구했던 소심하고 약했던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의 정신만은 누구보다도 날카롭게 빛났다. 당당히 '신은 죽었다.'라고 외치며 신의 노예로 살기보다는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살라고 말했다. 우리 모두가 초인이 되어야한다며 낙타의 짐을 벗어던지고, 사자의 날카로운 이빨을 누그려뜨려 아기의 부드러움을 가지라 말한다. 그에 대한 연민과 애정은 '니체 읽기의 혁명'을 읽으며 더 깊어졌다. 특히, 기존 번역어를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보다 니체의 철학에 알맞은 단어로 대체해준 손석춘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