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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나루의 한적한 하루

1948년 4월의 일이다. 김구 선생은 고심 끝에 김일성과 만나서 담판을 짓기로 결심했다. 남북이 서로 협상해서 단일 정부를 만들어 독립해야 한다고 믿고 평양으로 가기로 한 것이었다.
김구 선생이 평양으로 떠나는 날 아침, 남편이 찾아가보니 여러 청년들이 김구 선생이 타고 갈 스리쿼터(3/4톤 군용 반트럭) 앞에 드러누워 있었다. 공산당에게 이용만 당하느니 가지 말라는 뜻이었다. 남편이 김구 선생에게 걱정스러워하는 낯빛으로 인사를 올리자 선생은남편의 손을 꼭 쥐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내가 위험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어떻게든 나라가 둘로 갈라지는것만은 막아야 되지 않겠나."
김구 선생을 배웅하고 돌아온 남편이 이렇게 한탄하던 기억이 난다.
"공산주의, 자본주의라는 외제 사상을 뒤집어쓴 자들이 민족의 앞날을 크게 보지 못하고 갈등의 골만 파고 있으니..."- P250
해방 직후 우리나라 사정은 무질서와 빈곤 그리고 불안의 연속이었다. 해방되었다고 기뻐하기는 했지만 일본 치하에서 거들먹거리던 사•람들이 여전히 잘 살고 있는 실정이었다. 옛날 총독부가 사용하던 중앙청에는 미군정청이라는 것이 생겨서 삼팔선 이남의 모든 일을 맡아서 했는데 거기는 영어깨나 하는 친일파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반면에 우리나라와 상해, 만주 등 해외에서 나라를 찾기 위해 생명을내놓고 싸운 사람들은 아무런 대접을 못 받고 어려운 형편이 되었다.
우리가 사는 후암동은 원래 삼판통이라는 일본인 동네였다. 후암동엔 피난민들과 일본인 밑에서 행세하던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한사- P248
같은 일본 여성과 살면서 일본인 행세를 하고 있었는데 애들이 ‘똥배오리배‘라고 수군거렸다. 키는 작은데 배가 불쑥 동그랗게 튀어나와서그야말로 똥배 모리배같이 생겼다. 그 사람은 해방되고 나서도 일본인 행세하다가 미군정에 들어가더니 다음에는 대한민국 정부에까지들어가서 행세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인 밑에서 녹을 먹던 경찰관들과 군인들, 심지어애국지사를 잡아서 그토록 엄청난 고문으로 고통을 주던 고등계 형사들까지도 미군청정이 받아주었다. 남편은 이렇게 한탄했다.
"해방은 되었건만 아직 독립된 것은 아니야. 외국 군대가 와서 저렇게우리 민족의 앞날을 좌지우지하는데 어떻게 독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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