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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나루의 한적한 하루
  • 1945년 해방 직후사
  • 정병준
  • 24,300원 (10%1,350)
  • 2023-11-24
  • : 9,096

  시작은 희망찼다. 1945년 8월 15일 민중은 광복이 찾아온줄 몰랐다. 그러나, 이 시기 조선총독부 관리들과 접촉하며 광복을 준비한 여운형은 8월 16일 서대문감옥 문을 열고 독립투사들이 새시대의 빛을 보았다. 환희에 찬 민중들은 온몸이 땀으로 젖는데도 만세를 불렀다. 건국 준비위원 안재홍은 경성중앙방송국을 통해 라디오 연설을 했다. 광복의 기쁨을 용솟음치게하는데 여운형과 건국 준비위원회가 그 중심에 있었다. 8월 17일 전국에서 해방경축식이 열렸다. 일제의 패망을 자주적 독립국가 건설로 이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꿈꿀 수 있는 시기였다. 그러나,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자 칼자루는 우리 민족의 손에서 벗어나 미군의 손아귀에 쥐어졌다. 칼자루를 쥔 미군은 1945년을 광복의 환희에 찬 해에서 뒤틀리고 비틀린 한국사의 시작으로 기억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교과서에서 여운형이 총독부와의 협상을 통해서 행정권을 이양받았고, 여운형은 건국동맹을 기반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었다고 배웠다. 그러나, 이 설명에는 수많은 진실들이 묻혀있었다. 여운형이 일제강점기에 건국동맹을 만들어 광복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총독부는 치안협조를 여운형에게 요청했고 그 협상장에서 여운형은 5개의 요구조건을 관철시켰다. 광복이 다가오자 민중의 열망을 등에 업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었다. 환희에 찬 광복의 물결은 여운형이 준비하고 대비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그 환희의 순간에도 총독부는 가만있지 않았다. 자신들이 원하는 치안유지를 위한 협조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되자 곳곳에서 공작을 시작했다. 우리 교과서에 적혀있지 않지만 경무국장 니시히로 다다오는 조선은행에서 돈을 찍어내어 비자금을 만들었다. 미군은 이를 경제적 사보타주라고 말했다. 경제적으로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만들었고, 정치적으로는 친일파를 위한 공작을 초래했다. 친일파 김계조, 한치진, 박석윤 등에게 제공된 이들 돈은 공작금으로 활용되었다. 친일파뿐만 아니라 일본 헌병대와 경찰의 공작이 지속되면서 광복의 그날에도 총독부는 현실이 자신들이 의도한 방향으로 진행되도록 악마의 칼날을 휘둘렀다. 일제는 광복된 그날에도 순순히 물러가지 않았다!!

  9월 6일 미군이 한반도에 왔다. 미24군단이 남한에 진주하고 군사적으로는 유능할지 몰라도 정치적으로는 무능한 하지가 한국운명을 결정하는 칼자루를 쥐었다. 하지는 한국어를 할줄 몰랐다. 인종적 편견에 빠진 그는 한국인과 한국문화를 이해하려하지도 않았다. 결국, 영어를 할줄 아는 한민당과 연희전문학교 출신, 기독교인들을 가까이하려했다. 미군 통역을 맡으면서 문고리 권력을 쥔 이묘묵이 대표적이다. 광복후에도 나가사키 유조의 지시를 받아 공작활동을 한 그가 친미파가 되어 항일투자 여운형을 친일파, 공산주의자라고 매도했다. "미영타도, 귀축영미"를 열성적으로 외치던 친일파가 문고리권력을 쥘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으로 무능하다 못해서 어리석은 하지가 강력한 미4군단을 이끌고 한국의 정치을 마음대로하려했기 때문이다. 프로이센 군사 격언에는 유능한데 게으른 지휘관을 최상으로 쳤으며 무능한데 근면한 지휘관을 반드시 사라져야할 인물로 꼽았다. 하지는 무능한데 근면한 지휘관이었다. 

  결국 무능하면서도 근면한 하지는 친일 반공집단 한민당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법조, 경찰, 학무, 도지사등 거의 모든 요직을 한민당 혹은 한민당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자들에게 넘겨주었다. 소위 미군의 자문위원회를 한민당 인사들이 장악했고 그들에 의해서 엽관행위가 벌어졌다. 한민당은 초기 임시정부 절대지지를 외쳤으나 이는 건국준비위원회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레토릭이었을 뿐이다. 임시정부 요인이 귀국하자 종래의 태도를 바꾸었고 자신들이 모든 권력을 쥐려했다. 그랬기에 이승만은 한민당의 꼭두각시가 되지 않으려 대통령이 되자 한민당을 팽시켰다. 기독교를 믿으며 외국 유학을 갔다온 친일파 출신의 인사들이 미군정에게 사탕발림말을 하여 권력쥔 우리의 해방직후사는 너무도 슬프면서도 우습다. 

  놀라운 일은 한민당에 친일파들만 있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항일변호사 이인, 한국 사법계의 살아있는 전설 김병로, 사도법관 김홍섭은 1946년 한민당 사람이었다. 버치중위 같이 하지의 최측근 조차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그들은 이승만과 한민당을 위해서 부자들을 사법적으로 협박해서 강제로 정치자금을 모금했다. 항일투사가 친일파가 득실대는 한민당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결국 그들의 행위는 민족분단과 친일파의 권력장악, 나아가서 이승만 독재의 길을 터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항일 투사였던 그들에게 광복된 순간부터 친일은 트집잡을 꺼리가 되지 않는다고 여겼던 것일까?

  여운형, 김규식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좌우합작운동을 미군정도 지지했다고 교과서에서 배웠다. 그러나, 미군정의 속내는 그러하지 않았다. 미군정은 극우 이승만보다 중도우파 김규식이 한국의 대통령이 되길 바랬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정병준 교수는 그것이 우리의 착각임을 미군정이 이들에게 보낸 정치자금 액수를 통해서 증명했다. 미군정을 이승만에게는 +1,000만원을, 김규식에게는 +300만원을, 김구와 여운형에게는 0원을, 그리고 박헌영에게는 -240만원을 정치자금으로 제공했다. 미군정의 좌우합작운동과 김규식 지지는 겉으로 드러난 그들의 수단일 뿐이었다. 그들의 속내는 이승만과 한민당 절대지지였다. 교과서에서 드러나지 않은 미군정의 검은 손길이 얼마나 더 클까를 생각하며 소름이 돋는다. 


  정치적으로 어리석은 하지는 이승만과 한민당을 절대지지했다. 불법을 저질러가면서 이승만에게 =1,000만원의 정치자금을 제공했다. 자신의 간과 쓸개를 모두 이승만에게 바쳤으니 이승만의 절대 신임을 얻었을 것이라 그는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 9단 이승만은 하지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미국에 가서는 하지를 공산주의자라고 매도했다. 어리석은 하지는 현실 정치의 매서움을 맞닥드리고는 깊은 좌절을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회고록 한장 남기지 않은 것도 이때문일 것이다. 

 광복이라는 환희의 순간을 민족의 자주독립으로 이끌려했던 여운형은 극우파 한지근의 총탄에 저세상으로 갔다. 어리석은 하지는 떠나고 이승만은 절대권력을 쥐었다. 우리의 비틀리고 뒤틀린 역사를 이제는 바로잡아야하지 않을까? 그런데, 죽은 이승만을 소환하며 친일 발언을 쏟아내는 뉴라이트 인사들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1945년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음을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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