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철학 및 여러 가지 교양을 곁들여 사랑의 실천을 권유하는 책이다. 책의 전반부는 사랑의 필요성이다. 삶은 고통이고(일체개고) 모든 것은 무상하다.(제법무아). 저자는 무상을 제대로 관찰할 때 사랑과 자비가 나온다고 한다. 나의 내부를 들여다봐도 ‘참나’같은 것은 없고(무아) 행복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나온다. 타인의 고통에 민감해져 그 고통을 줄이려는 의지가 사랑이다. 그러니까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 상대에게 필요한 딱 한 공기의 사랑만을 주는 ‘부의 사랑법’ 이다. 왜 우리는 사랑을 하는 걸까. 저자가 스피노자의 예를 들 듯 사랑을 하는 이유는 결국 자기가 행복해서다. 저자는 사랑을 받는 게 아니라 사랑을 주는 것이 우리 삶의 의지에 결정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방법론은 타인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자신을 희생하는 느낌이다.(저자는 이것을 아낀다는 말로 표현한다.) 무작정 희생하는 것도 안 된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폐를 끼치는 폭력의 세계에서 최소한 자신으로 인해 타인이 고통받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한없이 예민해져야 한다. 상대를 100%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니 이것은 끝없는 수행에 가깝다. 이렇게 자기를 희생하는 고통이 행복으로 바뀌는 것이 강신주가 말하는 사랑의 마법이다. 상대방의 고통을 덜어 내게로 가져오는 일을 행복으로 느끼지 않는다면 어떻게 사랑이 가능하겠느냐고 저자는 반문한다. 삶의 의지와 의미를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상대를 아끼는 것-에서 찾는다는 점이 짚이는 대목이다. 책의 후반부는 사랑을 하는 방법론이다. 강신주의 평소 지론대로 주체적인 사랑을 강조한다. 평소의 사랑과 자유의 철학자라는 호칭대로 사랑과 자유를 등치시킨다. 자유가 없다면 아낌도,기쁨도, 유쾌함도,당당함도 모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유로운 두 존재가 서로를 온전히 마주보고 서로의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저자가 그리는 사랑의 초상이다. 드는 의문은 책에서 강신주는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지 말라고, 행복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나온다는 식으로 말한다. 이런 주장은 우리가 인문서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독예찬”과 충돌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유는 스피노자식대로 표현하면 그 만남이 나에게 기쁨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기쁨이 어떤 경로로 ‘타인의 고통을 줄여주려는 의지’로 변환되는 걸까. 생각할 수 있는 답은 ‘상대방을 나에게 묶어두기 위해서’, 즉 ‘상대방에게 사랑을 받고 싶어서’인데 이는 사랑을 받는 것보다 주는 게 더 중요하다는 말과 충돌하는 것 아닐까. 이런 사랑관에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의미의 이기심과 이타심이 아직 교통정리가 되지 않은 것 아닐까. ‘자신을 희생하면서 행복을 느끼는 사랑’은 결국 비현실적인 피안의 사랑같은 면이 있지 않을까. 완전히 불가능하지도 않겠지만 그렇다고 그런 사랑을 이상화하는 순간 결국 불완전한 지상의 모든 관계를 폄하하게 되지 않을까. ‘아끼는 사람을 반려동물 보듯 하라’는 충고는(반려동물에게서 댓가를 바라지는 않기 때문이다.) 약간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덧붙이자면 맨날 주인을 물고 짖어대는 우리집 포메라니안을 나는 사랑하지는 않는다. 강신주가 말하는 대로 아껴주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실전연애’의 답은 없지만 사랑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이 있다. 기존의 강신주 책처럼 여러 가지 소화하기 쉬운 철학, 종교 관련 에피소드들이 있어서 편안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착수처’라고 일상생활의 구체적인 실천안이 각 장 마지막마다 실려 있다. 기억나는 것은 ‘무상을 느끼기 위해 어제와 달라진 것을 억지로라도 찾아보려고 노력하라’,‘주인이 되기 위해 하루 세 가지는 아름다운 것을 찾아 내자’ 등이다. 애지중지하는 대상은 그 존재만으로 우리 삶을 기쁨으로 물들이고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우리 삶을 활기차게 한다고 한다. 어쩌면 사랑은 자신을 잃는 해탈 비슷한 것인지도 모른다. 현실적인 단어로 말하면 헌신이다. 내가 찾은 사랑의 대가들이 말하는 공통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