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청년들 중에 ‘불안하고 가난하지만 창작혼에 불타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 있을까. 예전에는 이런 초상들이 그래도 약간의 존경을 받았다면 이제는 그냥 찐따 취급을 받지 않을까. 하지만 저자에게 창작은 경이로운 황홀이자, 자기 초월이고 자신의 존재 이유이다. 그 초월을 위해 대체 자신의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을까. 창작의 불확실성, 우발성은 ‘내가 창작자다.’라는 정체성조차 위협한다. 다른 직업에도 성공 여부는 갈릴 수 있지만 그 성공 여부가 보통 정체성까지 위협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창작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변호하는데조차 훈련이 필요하다.(저자의 방법은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자신이 목소리를 낼 자격이 있다는 것을 기억할 것.매일 나는 **다. 라고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다.) 예전에 <이끼>의 김태호씨가 강의 중에 한 말이 문득 떠오른다. 허영만 선생같은 대가도 새로운 신작을 할 때 부담을 느낀다는 것이다. 즉 지금껏 성공해 왔다고 다음 신작이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암울함과는 별도로 이 책은 한없이 가볍고 발랄하다. 아이디어가 정령처럼 자신의 숙주를 찾아 작가들 사이를 떠돈다는 발상도 재미있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를 읽지는 않았지만 이럴게 글질을 잘 하는지는 몰랐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의 잠재적 경쟁자를 양산하는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 창조적 삶을 격려한다. 마치 명견 래시가 드넓은 평원에서 활기차게 양떼를 돌보는 모습이 떠오를 정도로 책장이 발랄하고 쉽게 넘어간다. 저자가 말하는 창작자와 창조성과의 관계는 우아한 파티에서 만난 연인과 사랑을 만들어 가는 것과 비슷하다. 상대를 신뢰하고 헌신하여야 하며 인내하여야 한다. 예의를 갖추고 자신을 꾸밀 줄도 알아야 하고, 진실해야 한다. 연인에게 “돈을 벌어오라”고 다그치는 건 금물이다. 창조성에게 경제적 성공을 기대하지 말고 본인이 창조성을 부양하라는 얘기다. 당연히 창작한답시고 회사를 그만두거나 빚 내가며 비싼 돈을 들여 예술학교에 가는 것은 금물이다. 예술은 생존에 필수적이지 않지만 삶을 빛내는 보석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창작을 하면서 심각해질 필요는 없다. 목에 힘이 들어간 열정 대신 호기심으로 자신의 창조력을 진전시키라고 충고한다. (쉽게 말해 본인에게 재밌는 것을 찾아 그냥 그걸 하라는 얘기다.) 전제는 당신안의 보물은 발견되고 현현하기를, 당신이 “예스”라고 말하길 기다리고 있으며 당신의 본질 자체가 창조성이라는 것이다. 비단 창작자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싶은 사람이라면 참고할 만하다. 저자가 말하는 예술관이나 창작 태도를 보면 니체가 말하는, 천진난만하게 유희의 정신으로 영원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어린 아이의 비유가 떠오른다. 용기를 가지고 그 모든 비평꾼들의 입방아와 실패에도 신경쓰지 않고 “그렇다면 한번 더”를 외치며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자신의 삶을 향해 풍덩 뛰어드는 것. 예술가의 삶에 관심이 없더라도 저자의 입담 덕에 그냥 재미로라도 몇 번 더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에 나오는 예술가의 고뇌를 내적인 고뇌와 외적인 고뇌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내적인 고뇌는 창작과정에서 나오는 좌절감과 실망이다. 저자는 창작과정에서 좌절하는 것은 창작과정의 일부이고, 그것 때문에 포기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사랑이 그 정도였다는 뜻이라고 한다. 외적인 고뇌라면 결국 돈이고 성공이다. 저자가 내세우는 비장의 무기는 외부적인 성공과는 별개로 자신이 사랑하는 일에 헌신하는 일은 그 자체로 숭고하고 즐거운 일이라는 것이다. 어차피 비평가는 당신에게 관심이 없고 각자 제 갈 길이 바쁘다. 당신은 그냥 자신의 일을 즐기면서 하면 된다. 읽고 나면 ‘즐거움 지상주의’ 같은 느낌이 든다. 뇌과학적(?) 비유를 들자면 저자가 드는 창작의 장애물은 전부 ‘좌뇌적’인 느낌이다. 마이클 싱어가 명상 서적에서 말하는 쉴새없이 품평하고 비교하고 떠들어대는 목소리말이다. 저자가 하는 격려는 그 목소리에 굴복하지 말라는 것이다. 반면 저자가 창조의 즐거움을 묘사할 때 드는 ‘초월’이라는 단어는 ‘우뇌적’이다. 창작자의 기쁨이 마치 명상가가 자신의 자의식을 잊어버리고 열반의 기쁨에 드는 것같은 느낌이다.
딴지를 하나 걸자면 저자야 글쓰기에서 소명과 ‘사랑’을 찾아서 그것에 헌신하는 과정 자체에서 행복을 느꼈지만 그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특이한 일 아닐까? 자신만의 꿈이나 목표를 찾으라는 말이 텅 빈 말이라는게 이미 최근의 동향 아닌가.(예를 들어 <행복하게 일하는 연습>(코이케 류노스케,랜덤 하우스), <인생 반 내려놓기>(나카지마 요시미치,21세기북스)
사랑은 대상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라고(<올 어바웃 러브>(벨 훅스,책읽는 수요일) 인생에서 사랑하는 태도를 가져라, 라고 진행시킬 수는 있을 것 같지만 말이다. 또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과정에서 얻는 만족감이 너무 커서 결과는 말 그대로 무시해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머리로 상상은 돼도 체감은 되질 않는다. 오히려 그 정도로 몰입감과 만족감을 주는 일 자체를 찾기 힘든 것 아닐까. 생업을 유지하며 불륜상대를 만날 시간을 내듯 창작할 시간을 내라는데 말이 쉽지, 그건 창작의 씨앗이 짓밟히는 것 아닐까. 생업에 치여 창작자의 길을 결국 포기한 사람에게 네가 포기한 건 어차피 그 정도의 재능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건 가혹한 것 아닐까. 예전에 고독사한 영화감독이 떠오른다. 어쨌든 내 안의 창조성의 정령이 나를 기다린다는 저자의 ‘망상’이(우리 모두는 각자의 망상 속에 산다는 저자의 말) 진실이기를. 유일하게 맘에 안 드는 것은 <씨크릿>류의 책을 연상시키는 북디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