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어봐서 아는데...’ 보다 더 강력한 언술이 있을까. 더군다나 하버드 대학에서 커리어 절정을 구가하던 신경해부학자의 증언이다. 뇌졸증에서 회복한 뇌과학자라니, 스티븐 나이바우어가 비슷한 말을 한 것 같은데 신이 내린 우연 같은 느낌마저 든다. <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에서도 뇌과학자가 신비주의자의 언어를 써서 경악했었는데 이 책에서 저자가 우뇌를 설명하는 단어를 보면 역시 경악이 들어간 탄성을 지르게 된다. 조건없는 사랑, 우주적 의식의 일부 등등,, 이거 아니타 무르자니가 임사체험 후에 한 말이다. 임사체험이라는게 우뇌 의식으로 가는 거였나? 더 나아가 우파니샤드의 아트만, 브라흐만의 묘사이기도 하다. 자꾸 들으면 허황된 말도 혹시,하고 흔들리는데 이렇게 연이어 두들겨 맞으면 진짠가? 하는 의심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아니타 무르자니야 인도인이었으니 평소의 문화적 배경이 환각으로 나타났다고 추측할 수 있지만 저자의 이런 이야기는 어떻게 ‘스켑틱’하게 해석할까? 하버드대에서 경력을 망친 과학자의 일탈? 저자는 뇌를 우반구, 좌반구, 각 반구를 두 개의 영역, 총 네 개의 캐릭터로 소개한다. 단순하게 요약하면 좌뇌(캐릭터 1,2) 는 개인적 정체성과 타인과 분리된 자의식을 나타내고 우뇌(캐릭터 3,4) 는 바탕에 깔린 무의식, 우주적 흐름과의 연결을 나타낸다. 일단 저자의 관점이 지극히 유물론적인 것은 맞다. 우리가 느끼는 기쁨, 고통이 결국 뇌세포의 기능에 의존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만, 그건 신경회로망의 작동일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우리의 감정을 선택하고 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일종의 스토아 철학 느낌의 마인드셋이 나온다.) 하지만, 우뇌(캐릭터 4)를 우주의식과 연결되는 생물학적 플랫폼 정도로 묘사하고, 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비유적 의미가 아니다.) 우파니샤드 세계관에서는 구십도로 튄다. 오감으로 지각할 수 없는 우뇌의 대안적 현실은 좌뇌 성향의 선형적 (저자에 따르면 시간을 선형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좌뇌, 오로지 현재만 지각하는 것은 우뇌의 몫이다.) 실험으로는 증명할 수 없고, 좌뇌는 이를 거부할 것이지만, 이를 극복하는 과학적 방법이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먼저 저자가 공들여 서술하는 것은 캐릭터 1,2,3,4의 특징이다. 독자는 자신의 4 캐릭터에게 이름을 붙이도록 권유받는데 나중에 등장하는 ‘두뇌회담’을 위해서다. (저자의 경우 각 캐릭터 이름은 헬렌, 애비, 피그펜, 여왕 두꺼비다.) ‘두뇌회담’은 현재 자신이 어떤 캐릭터인지 알아차리고 각각의 캐릭터를 ‘팀’처럼 운용하며 삶의 순간에 대처하는 일종의 기법이다. 내용이 여기서 자기계발서 비스끄레 흘러가는데 명상에서 말하는 ‘알아차림’의 뇌과학 버전같은 느낌이다. 유용할 것 같긴 한데 불충분하게 기술된 것인지 저자의 두뇌회담 기법이 아주 마음에 와닿지는 않는다. 아예 다이어트 프로그램처럼 패키지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상식적으로 해석하면 자동화된 반응을 멈추고, 자신에게 감정과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기법 같다. 그렇게 보면 정말 알아차림 명상의 뇌과학 버전이다.
하지만, 이 책에는 뇌과학 서적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융심리학과 캠밸의 영웅신화가 등장한다. 각 캐릭터를 융의 원형과 대비시키고(그러니까 융 심리학의 생물학적 기반이다.) 우뇌로 가는 것을 영웅신화의 영웅의 여정에 비유한다. 영웅신화에서 하나 문제가 되는 것이 영웅의 귀환이다. 깨달음을 얻은 영웅은 다시 속세로 귀환해서 자신의 삶을 이어가야 한다. 영웅은 속세와 단절한 채로 살 수도 있고, 속세와 자신의 깨달음을 조화시키며 주변과 연결을 유지할 수도 있다. 저자는 모든 캐릭터가 중요하고 가치있다고, ‘전뇌적’ 삶을 살고 균형을 유지하라고 한다. 저자가 말하는 두뇌회담은 속세로 돌아온 영웅이 살아가는 방법같기도 하다. 저자는 캐릭터 4의 상태에서 필요에 따라 캐릭터 1을 방문하는 식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자신의 자아가 먼지 한 톨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어째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