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년대 아메리카 대륙, 미친말과 시팅불이 살아있고, 기병대와 원주민들이 서로 싸우는 세상. 아침에 만났던 이웃과 친족들을 저녁에 다시 만나리라 기대할 수 없는 세상. 거기서 태어나 성장한 검은고라니에게 세계와 자신의 삶에 대한 감각과 정서는 지금과 사뭇 달랐을 것이다. 지금 가자에서 쏟아지는 폭탄 아래에서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삶과 세계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 것인가. 확실한 건 세계가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육박해 들어오는, 파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힘으로 느껴질 것이란 거다. 이 책은 두 가지 줄기로 이루어져 있다. 검은고라니가 어렸을 때 받은 계시와 그 계시를 현현하기 위해 벌이는 아메리칸 원주민들의 여러 의식들의 묘사, 그리고 운디드니의 학살로 대표되는 원주민들과 기병대 간의 전쟁 묘사이다. 얼핏 융이 이 책을 호평했다고 하는데, 계시를 여러 상징과 제례로 표현하는 원주민들의 문화는 융심리학의 ‘내면작업’을 연상시킨다. 보이지 않는 힘은 존재하는가? 아니면 세계는 단지 원자들의 무의미한 이합집산일 뿐인가? 이 책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권능’이다. 신성한 권능에 접근하기 위해 원주민들은 섬세한 상징을 이용해서 보이지 않는 힘들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어렸을 때 검은고라니는 그가 와지쿠들에 맞서 그의 부족을 부활시킬 거라는 계시를 받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의 결과를 아주 잘 알고 있다. 검은고라니는 과연 실패한 것일까? 결국 계시는 검은고라니의 환상이고 그의 권능이 작으나마 사람들을 치료하고, 미래를 예언한 것은 우연이거나 원주민의 문화적 영향일 뿐일까? 회한 비슷한 생각에 잠기게 된다. 검은고라니는 계시 중에 와지쿠의 박해가 없는, 죽은 친척들과 들소들이 부활한 이계를 엿본다. 또다른 근사체험을 한 아니타 무르자니(<그 후로 모든 것이 변했다>) 는 이계를 하나의 에너지처럼 느낀다. 사후세계에 대한 묘사가 문화에 따라 다른 것은 사후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하나의 반증인가? 계시와 태양춤(선댄스다) 의 묘사는 상당히 구체적이지만 그들의 코드를 공유하지 않는 우리에게 이질적이다. 오히려 체감할 수 있는 부분은 기병대와 원주민 간의 전투 묘사다. 이를 테면 전투중 부상당한 와지쿠에게 열세살 소년이 다가가 머릿 가죽을 벗기려고 한다. 와지쿠의 머리카락이 짧아 소년은 애를 먹는데, 그 와중에 부상당한 와지쿠는 이를 갈며 저항한다. 그러자 소년은 와지쿠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고 머릿가죽을 벗긴다. 어머니에게 그걸 보여주자 어머니는 환호한다. 이 소년이 검은고라니다. 그는 환상 속에서 모든 생명체가 조화하는 것을 보며 기뻐하고, 현실에서는 추위를 피하러 온 다람쥐를 불쌍히 여겨 내쫓지 않는 자다. 하지만, 이 날것의 폭력과 죽음의 세계에서 와지쿠의 시체를 두동강이내고, 뚱뚱한 여인과 알몸으로 싸우다 죽는 와지쿠에게 아무런 연민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나는 미쳐 있었다"라고 말한다. 피비린내와 시체가 사방에 널려 있는 세계, 아이들과 여인들이 “제가 잡혀가는 것은 원하지 않으시겠지요” 라고 노래부르며 살인과 폭력, 잔인함을 독려하는 이 세계에서 지금 내가 가진 정서와 이성, 도덕은 통하지 않는다. 가장 전율하는 것은 그 세계의 압도적 힘과 그런 세계를 그저 감내할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의 실존이다. 마치 아이들의 장난으로 별안간 죽음을 맞은 곤충처럼 그들은 그들의 세계를 이해할 수도 없도, 저항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아마 이 대목을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무라카미 류)에서 읽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압도적 세계 앞에 있다. 피비린내가 나진 않지만 역시 폭력적인 그 세계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검은고라니처럼 그 세계를 그냥 오롯이 받아들이는 것 뿐이다.
ps. 당시 원주민들의 여러 스펙트럼도 볼 수 있다. 크로우족과 라코타 족은 서로 와지쿠를 대하듯 싸우고, 심지어 상대를 죽이기 위해 와지쿠와 협력하기도 한다. 붉은구름 같이 와지쿠와 타협하여 '주재소'에 머무르는 원주민도 있고 시팅불처럼 캐나다로도 떠나는 부족도 있다. 그러면서 마치 구한말 여러 스펙트럼이 있었지만 망국으로 연결되었듯 그들 문화는 종말을 맞이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