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어둠을 몰아내는게 아니라 빛이 커질수록 어둠은 더 커진다. 언젠가 감당할 수 없게 된 어둠은 삶이라는 판을 뒤집고 중년의 위기를 불러올 것이다. 저자가 정의하는 자아란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자신이자 자기가 누구라고 인식하고 있는 자신”이지만 그림자는 그런 자아가 거부하는 우리 자신의 일부분이다. 마치 라캉이론에서 상징계에 진입하기 위해 주체가 자신의 일부를 희생하는 것처럼, 저자의 모델에서 인간은 문명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부분을 그림자로 만든다. (여기서 저자가 짚는 아이러니한 부분은 선악의 기준이 문화마다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하지만, 게임의 룰은 신에게 받은 것은 전부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발전된 유럽에서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처럼 억눌린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 저자의 드는 주된 메커니즘은 “투사”이다.(저자는 낭만적인 사랑도 투사로 설명한다.) 우리는 자기 안의 인정하기 싫은 그림자의 부정적인 면을 타자에게 투사하는데 그 결과가 인종주의나 전쟁 등으로, 그림자의 긍정적인 면을 투사할 때는 영웅숭배가 나타난다.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은 그림자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내면작업>(동연출판사)을하는 것이다. 상징이라고 우습게 보면 안된다. 무의식에게 상징은 진짜 현실과 같다. 내면작업을 하면서 자신의 자아가 다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읽어보면 거의 오컬트 느낌이 들 정도다,) 책에 나오는 방법은 “그림자의 특질을 표현하면서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거나, 단편소설을 쓰거나, 춤을 추거나, 불에 태우거나, 땅에 묻어버리는 행위”이다.
저자의 최종목표는 “전일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자신의 그림자를 통합한 상태를 역설로, 그렇지 못한 상태를 모순으로 개념화하는데 가장 애매모호한 부분이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라는 맥락인지 저자는 각자의 상황이 다르다는 말로 구체적인 언급을 피한다. 모순은 한 가지 대극만 추구할 때 발생하는 것으로 ‘바른 것’에 의존한다. 반면 역설을 두 대극을 전부 존중하는 것으로 충돌을 의식으로 온전히 견디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강인한 자만이 역설을 견딜 수 있다. 좀 더 현실적으로 묘사한다면 딜레마에 빠졌을 때 ‘타협’(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을 때 떡볶이를 먹고 죽는 게) 아니라 상이한 동력을 에너지로 해결책(떡볶이를 먹고 싶은 욕망과 죽고싶은 욕망의 공통점을 찾는 것?)을 찾는 것이다. 저자는 선악은 하나이고 죄책감은 오만이라고 까지 말하는데 저자의 논리는 상대주의와 관련된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전쟁과 죄책>(노다 마사아키, 또다른 우주) 은 죄책감이 삭제된 전후일본사회가 다시 극우로 기울어지는 상황을 지적한다. 인간의 발달을 직선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포토라인 앞에서 고개를 뻣뻣이 드는 사람들한테 기가 차는 우리 사회에서는 차라리 죄책감 좀 느끼라고 말해주고 싶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만돌라”를 설명한다. 두 개의 원이 겹치는 이미지이고 대극 사이에 연결점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언어는 동사를 이용해 주어와 목적어를 일치시키는 만돌라이고, 바흐의 마태 수난곡 중 십자가 처형장면은 잔잔한 음조와 거슬리는 음조를 이용한 만돌라이다. 저자는 죄책감에 쏟는 에너지를 이용해 만돌라를 창조하라고 조언한다. 뭐 당장은 만돌라가 뭔지 모르더라도 딜레마의 상황에서 공통점을 찾으려고 하는 관점은 즉시전력으로 실생활에 투입할 수 있을 것 같다. 추상적이고 계시적인 문장은 이 책의 장점과 단점이다. 위안과 영감을 주지만 동시에 읽어도 뭘 읽었는지 멍해지는 그런 효과를 가져온다, 책의 내용에 동의 여부를 떠나서 위안과 영감을 얻고 싶은 분에게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