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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명님의 서재

라캉에게 무의식은 억압된 트라우마라기보다 상징계가 주체에게 미치는 효과에 따라 탄생하는 것이다. “나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그것은 타자가 나의 생존에 절대적일 때의 생존방법이기도 하고, 언어라는 대타자를 애초에 내가 만들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타자의 언어와 욕망을 통해서 우리의 욕망을 말할 수 밖에 없는 이상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다.”(p112.)

 

나는 타자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결여의 존재이고, 타자 역시 완전하지 않은 결여의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타자가 나를 사랑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 타자가 원하리라 짐작되는 것을 내가 가지면 나를 사랑할 것이기에- 타자가 결여한 것을 원할 수 밖에 없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영원히 알 수 없다. 나는 대체물로만 만족해야 하고, 그러한 욕망을 가지는 순간 주체가 된다. 욕망하는 순간 상징계의 체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된다.

 

내가 이해한 라캉의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 파랑새를 찾아 영원히 떠도는 이미지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소소한 쾌락은 가지지만 영원히 결핍에 시달리는 존재, 물론 억지로 갖다 대기지만 부처의 “삶은 둑카다.”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는가. 추가적인 질문은 “충동”(drive)는 주체와 어떤 관계인 걸까. 상징계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주체의 논리를 세우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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