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욕망이라는 하나의 기표를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다른 기표로 치환하는 과정을 수반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초기의 치환행위를 통하여 의미작용의 과정이 시작되고 아이는 결여의 주체로서 상징계에 작업한다. 또한 이 때문에 라캉은 상징화 과정자체를 ‘팔루스적’이라고 묘사한다. 팔루스는 아버지의 이름을 통하여 무의식을 조직· 편성하는 중심적 기표로서 실행된다. 누구도 애초에 그것을 소유한 적이 없다는 전제 하에 ‘팔루스’는 근원적 상실 대상으로 간주된다.(p89)
내가 상실했다고 상상하는 것.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잃어버렸다고 상상하기 때문에 그것은 절대 채워질 수 없는 결핍이 된다. 그것을 받아들이면서(그것에 복종하면서) 나는 주체가 된다.
선생님의 말: 라캉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서 남자는 아버지에게 복종하면서 쾌락을 얻는 대신에 자신의 일부를 희생한다. 반면 이런 과정이 없는 여자는 진정한 혁명이 가능하다.(아마도 남자는 시스템에 굴복하는 대신에 주체가 되고 쾌락을 얻는 반면에 여자는 아예 시스템 바깥에 있다는 뜻)
동시에 아버지는 법을 상징하지만, 자신은 법 바깥에 있기도 하다. 즉 아버지에 복종한다는 것은 법을 위반하는 욕망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법과 법을 위반하고자 하는 욕망은 죄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주체는 이것을 피할 수 없다. 법에 복종할 수록 죄의식은 더 증가하는 것이다.
팔루스는 구체적으로 언어를 말하는 것일까?
ps "연애나 결혼관계는 단순히 당사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친구,친척 그리고 제도를 포함하는 전체 사회조직에 관계된다. 즉 개인적인 관계들이 남녀를 사회적인 의미들로 구성된 상징회로 안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p84)
어째 이 문장이 쏠린다. 연애관계란 개인적 관계가 아니라 '기표'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