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좀 독특한 책입니다. 이 책의 첫 출간 일은 1335년이라고 합니다. 나온 지 690년 된 책입니다. 그리고 표지에는 '13세기 스페인의 현명왕 알폰소 10세의 조카, 돈 후안 마뉴엘 왕자가 남긴 문학적 유산!'이라는 되어 있습니다. 알폰소 10세가 누군지 아실 분 계실까요? 일단 저는 몰라서 알아봤습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만 고려 시대 때로 당시는 원나라와 전쟁 시기인데, 이때 스페인 카스티야 연합왕국의 왕으로 스페인 지역에서 무슬림 제국과 전쟁으로 유명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분을 내세워서 돈 후안 마누엘 왕자를 소개했을까요? 좀 의문이긴 합니다. 이 분도 조사해 보니 나름 스페인 산문 문학을 비약시킨 분으로 나와있네요. 그리고 이 작품에 실린 작품 중에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와 안데르센의 <벌거벗은 임금님>의 원형으로 보이는 작품도 있는데 이걸을 활용하지 않으시다니 좀 아쉽긴 했습니다. 뭐 제가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었겠죠. 제가 알고 있는 스페인 사람으로는 페넬로페 크루즈, 하비에르 하르뎀, 안토니오 반데라스 그리고 세르반테스 정도니까요.
이 작품은 루카노르백작과 그의 조언자 파트로니오의 대화를 통해서 시대를 살아가면서 유용한 삶의 지혜를 독자들에게 이야기합니다. 특히 파트로니오는 직접적인 설명보다는 우화를 통해 깨달음을 주는 방식으로 루카노르 백작에게 조언을 해줍니다. 이런 조언 방법은 자신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다 보니 사심이 덜해 보인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왜냐면 직접적으로 이야기할 경우 조언이 아닌 명령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언을 직언을 날리는 사람들의 경우 자칫 상대에게 마음의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친구인 경우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지만, 상하관계라면 문제가 됩니다. 충신들이 충직한 직언에도 불구하고 목이 달아나는 경우가 이런 경우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군주가 깨닫게 하는 방식은 충신이면서 끝까지 살아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삼국지의 경우를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조조에겐 수많은 참모들이 있었습니다. 굉장한 인재들이었습니다. 그중에서 가후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동탁의 참모였지만 조조에게 투항하여 죽을 때까지 조조의 참모였습니다. 조조가 후계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장자인 조비와 삼자인 조식을 놓고 말이죠. 조식은 학식이 뛰어나고 영특하여 큰 재목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자 상속의 원칙이 있던 당시로서 삼자인 조식을 후계로 세운다는 게 당시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일 수 있습니다. 반면 당시는 난세로 조금 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왕이 되는 게 좋을 거란 생각도 있었습니다. 다른 신하들에게 그들은 두 왕자의 파벌로 나눠져서 지지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 의견이 너무 팽팽하여 결정이 쉽지 않은 순간 그는 가후에게 찾아갑니다. 나이가 들어 은퇴하였던 가후는 조조의 질문에 빙그레 웃으며 한 마디 합니다. '원소를 생각해 보시지요.' 조조는 이 한마디에 조비를 후계로 하기로 마음을 잡습니다. 원소는 장자 원담이 아닌 자신이 사랑하는 삼남 원상을 후계로 내세우며 내전이 발생하고 그 후 원씨 세력은 멸망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가후는 직언 대신 이런 식으로 조언을 함으로써 조조의 참모 중 거의 유일하게 살아서 은퇴할 수 있는 복을 누렸던 겁니다.
이처럼 파트로니오는 루카노르 백작의 심기를 건들지 않으며 그에게 조언을 할 수 있었고 그의 조언을 가장 자주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이 작품에는 그렇게 실린 48편의 우화가 있습니다. 다 읽고 나서 루카노르 백작은 결정 장애를 가진 사람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자주 물었던 것 같네요. 심지어 읽다 보면 루카노르 백작은 파트로니오 말고도 다른 사람들에게 수많은 조언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최종 결론을 내리기 전에 파트로니오에게 최종 조언을 들었던 게 아닌가 합니다. 결국 저자인 돈 후안 마누엘 왕자는 이상적인 군주와 이상적인 참모의 관계를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귀가 열린 군주와 겸허한 자세의 참모를 말이죠.
작품에는 우화로 되어 있다 보니 쉽습니다. 재미도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나 안데르센의 <벌거벗은 임금님>과 같은 동화의 원형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공감하지 못한 건 그 당시의 사회상이 원하는 지혜가 동양철학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동양적 군주론과는 대조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책에는 자신에게 피해를 입히지만 그래도 친분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거리를 두라고 하지만 동양적 군주론에선 덕이 부족하여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으니 좀 더 대범하게 덕을 쌓으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서양적 관점과 동양적 관점을 비교할 수 있어서 저는 흥미롭게 볼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기에 실려 있는 48편의 우화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삶의 지혜가 지금도 통용될 수 있다는 게 정말 놀랍습니다. 세상이 나날이 발달하며 엄청난 문명의 발달을 이뤄냈지만 그 안에 사는 사람의 고민은 7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게 없으니까요. 이 책을 통해 오늘도 하루를 사는 지혜를 배워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