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번역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번역은 회를 뜨는 일과 비슷해서, 어차피 살아 있는 생선에 칼을 댈 수밖에 없다면 최대한 싱싱한 상태로 먹을 수 있게 해줘야 한다.”
번역하는 입장에서 그의 비유가 100퍼센트 들어맞는다고 인정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수긍이 간다. 그럼 이 비유로 봤을 때 번역가가 싱싱한 회를 뜨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을까? 그야 무궁무진한 답변이 나올 수 있겠지만 가장 기초적인 일은 아마도 칼을 날카롭게 갈아두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말이 쉽지 평소에 칼을 갈아둔다는 게 그리 녹록치 않다.
다시 이 비유로 돌아가 번역가가 잡게 될 고기가 고등어가 될지 다랑어가 될지 아니면 고래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프리랜서인 번역가는 그때그때 들어오는 의뢰, 다시 말해 손님이 먹고 싶어 하는 생선에 맞춰 최대한 싱싱하면서 버리는 부분 없이 알뜰하게 회를 떠야 하는 데 그런 기량을 닦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나로 예를 들자면 마음 같아선 쉽고 말랑말랑하고 달콤한 로맨스 소설만 맡아서 이대로 숟가락 놓을 때까지 쭉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나 항상 현실은 이상을 배신하는 법. 절대로 맡지 않겠다던 수학 공식이 가득 찬 소설을 맡아서 미리부터 식은땀을 흘리는 와중에 이번엔 무기와 테크놀로지 용어가 무수히 나오는 소설을 받았다. 주여, 어찌 이런 시련을...이라고 절규하고 싶은 걸 꾹 참고 그래서 요즘은 무기 관련 용어를 하나씩 배워가고, 무기 관련 카페와 사이트도 기웃거리는데.
오, 신기하게도 나랑은 전혀 인연이 없을 것 같은 무기들이 조금씩 친숙해지기 시작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연일 북한의 강도 높은 허풍 내지 도발에 미국이 한반도 인근 해역에 배치하는 미사일 관련 기사들을 쉽게 접할 수 있어서 이젠 B-52기와 F-22(사진으로 봤는데 좀 멋지구리하더라)의 차이도 알게 됐고, BLU-82폭탄, 일명 데이지커터와 모아브 같은 폭탄 명칭도 익혔다. 이 소설이 끝날 쯤에는 누군가가 네이버에 올린 엔터프라이즈 항공모함 대 세종대왕함이 붙으면 누가 이기나요?란 질문에 답변도 달 수 있을 것 같은 착각마저 일고 있다.
물론 이렇게 벼락치기로 공부한 내용은 답안지에 답을 적는 순간 사라지는 지식처럼 번역이 끝나면 허무하게 잊어버릴 것이다. 그게 사실 모든 번역가의 숙명이다. 일의 성격상 잡다하고 다양한 분야의 표면을 건드리면서 그때그때 작업을 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걸 아는 것 같지만 사실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게 단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쨌든 회는 떠야 하고, 기왕지사 싱싱하고 맛난 회를 뜨려면 이렇게 이를 악물고 칼을 가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걸 실감하면서 다시 태어나면 번역은 하지 말아야지, 라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