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기획'이란 두 단어를 들으면 귀가 쫑긋해졌다. 그건 아마도 번역을 시작해서 내 손끝을 거친 책들의 운명을 따라가면서 생긴 호기심인 듯 하다. 그동안 말로 하기에도 창피할 만큼 몇 권 안 되는 책을 번역했지만 어떤 놈은 승승장구하는 놈이 있는가 하면 어떤 놈은 애처로울 정도로 생명력이 짧은 책도 있었다. 내 예상에 맞는 반응을 보인 책도 있고 예상을 좋게든 나쁘게든 빗나가는 책도 있고. 도대체 책이란 어떻게 만들어져서 어떤 팔자를 맞게 되는지 궁금해하던 끝을 쫓아가보니 기획이란 단어가 화두가 됐다.
그러던 중 '기획회의'란 잡지를 통해 책에 관한 여러 가지 궁금증을 이렇게 저렇게 풀게 됐다. 그리고 마침내 '기획에는 국경도 없다'란 책을 만났다. 무릇 기획이란 편집자의 손에 전적으로 달렸다고 보는 사람들도 많지만 번역가로서 출판사에서 의뢰하는 책만 하는 것보다는 직접 서점을 다니며 발품을 팔고, 인터넷을 뒤져서 가슴이 두근거리는 물건을 찾아 계약을 성사시켜 책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는 것도 가슴 뛰는 일이란 생각에 난 항상 기획이 하고 팠다. 그러다 이 책을 읽으면서 '너, 잘 만났다'라고 여러 번 외쳤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재미있다는 것이다. 기획이란 소재가 만만치 않거니와 너무 전문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면 딱딱할 수도 있을 텐데.
이 책은 마치 만화책이나 가벼운 소설책을 읽는 것처럼 술술 읽힌다. 그러면서도 예로 든 각국의 출판사들과 기획 사례가 참신하면서 독특해서 연거퍼 내 눈이 휘둥그래지곤 했다. 기획자는 창의력이 뛰어나야 한다는 말을 전에 듣고 이해를 못 했는데 실제 사례를 보니 안 그러면 할 수 없는 일이 기획이란 걸 실감했다. 그리고 실용서의 저자(이 책을 과연 실용서라고 부를 수 있다면)답지 않게 글이 뛰어나고 자연스러워서 읽는 맛이 한층 더 좋았다고 할까.
그러나 어린이 책에 삽화를 너무 넣지 말라는 의견에 진하게 공감하고, 먼지 같은 영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출판 풍토와 문화 조성에 고개를 끄덕이고, 책을 문화 상품이 아니라 교육 상품으로 접근하라는 발상의 전환에서는 참 유익한 아이디어란 생각도 들었지만 그밖에 아쉬운 점도 몇 가지 눈에 띄었다. 한 가지는 저자가 불어 번역가여선지 유럽을 배경으로 한 사례가 너무 많아 읽으면서도 현실감을 느낄 수 없었다. 인문학 총서 시리즈와 그림책을 전문으로 하는 출판사의 사례 같은 경우, 나의 지식이 일천해서인지 그냥 그런 경우도 있구나 했을 뿐 그닥 동의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인문학과 환경서적을 중심으로 소개한 사례들은 아주 풍부하고 질적으로도 뛰어나서 저자의 방대한 지식에 놀랐지만 아쉽게도 소설쪽의 기획이나 저자 발굴 같은 사례가 거의 없어서 아쉬웠다. 아무래도 우리 나라는 소설을 중심으로 독서 시장이 재편되는 경향이 짙지 않던가.
그러나 한 권의 책에 방대한 출판 시장을 모두 담아서 간추리기란 불가능한 법. 기획의 에이비시도 모르면서 무조건 오매불망 기획을 꿈꾸기만 했던 나로서는 한 줄기 가닥을 잡았달까, 아니면 기획의 바다에 한 발짝 발을 들여놓을 용기를 얻었달까. 뭐 하여튼 어디서쯤은 시작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설핏 들기도 했다. 알면 알수록 흥미로운 기획의 세계.
책에서 말한 것처럼 무지막지하게 공부하고, 다방면으로 독서하면서, 창의적으로 사고하며, 출판시장을 항상 주시하며 통찰력을 키워간다면 언젠가는 나도 근사한 책을 한 권 기획할 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 물론 앞에 늘어놓은 전제조건들이 너무 거창하고 아득해보이긴 하지만. 이 책을 읽은 것으로 적어도 시작은 됐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