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맥락 없는 데이터베이스
  • 벚꽃동산
  •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 12,420원 (10%690)
  • 2009-11-30
  • : 2,512

안톤 체호프는 인간 내면과 사회적 갈등을 섬세하게 포착한 단편 소설의 대가로, 짧은 이야기 속에 삶의 희로애락을 압축적으로 담아냈다. 그의 마지막 희곡인 『벚꽃동산』은 단편에서 보여준 문학적 정수를 확장된 서사로 풀어낸 작품이다. 벚꽃 동산이라는 상징적 공간을 배경으로, 상실과 변화, 그리고 기억의 복잡성이 얽힌 인간 군상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내가 가장 깊은 울림을 느낀 인물은 다름 아닌 저택의 늙은 하인 피르스다. 그의 존재는 단순히 과거의 잔재를 넘어, 변화에 휩쓸린 인간 조건의 본질을 묵직하게 드러낸다.


피르스는 희곡에서 대사도 많지 않고 사건의 주도권도 없다. 그는 농노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류보비 가문에 충성하며 과거의 흔적 속에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존재 자체가 작품의 정서를 집약한다. 마지막 무대에 홀로 남아, 희미해진 정신 속에서도 과거를 더듬으며 중얼거리는 그의 모습은 단순히 한 시대의 끝을 알리는 것을 넘어, 상실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조건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귀가 어두워지고 무력해진 피르스는 더 이상 자신이 지키려는 세계에 유효하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 그의 행동과 말 속에는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채 과거의 질서와 관습 속에 갇힌 한 인간의 슬픔과 무력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특히 그의 마지막 대사, “살긴 살았지만 도무지 산 것 같지가 않아”는 단순히 한 인물의 고독을 넘어, 모든 과거의 유산과 인간 조건의 허망함을 응축한 선언과도 같다. 이 말은 과거를 지키려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삶의 허무함, 그리고 시대의 변화 속에서 소외된 자의 깊은 고독을 절절히 담고 있다.


체호프는 피르스의 마지막 장면을 통해 변화와 상실의 비극을 극대화한다. 텅 빈 무대에 홀로 남은 피르스, 멀리서 들려오는 나무를 찍는 도끼 소리는 낡은 체제의 종말과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도끼 소리는 희망의 서곡이라기보다는, 상실과 쓸쓸함이 스며든 잔향에 가깝다. 피르스는 새로운 시대를 위해 사라져야 했던 과거의 잔해이자,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잊혀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연민의 초상이다.


『벚꽃동산』에서 피르스는 잃어버린 낙원의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그림자이자, 변화의 급류에 휩쓸린 과거의 초상이다. 흔히 낡은 시대의 우스꽝스러운 유물로 여겨지지만, 나는 이 작품에서 피르스를 그 이상의 존재로 본다. 무대 위 가장 보잘것 없고 연약해 보이는 노인 피르스는, 역설적으로 『벚꽃동산』의 그 누구보다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인물이다. 그는 무너져가는 과거의 성벽에 기대어 서서, 그 너머로 밀려오는 변화의 파도를 온몸으로 받아낸다. 그의 마지막 독백은 한낱 늙은 하인의 넋두리가 아니다. 그것은 한 시대의 종말에 바치는 애가이자, 소멸해가는 과거의 유산을 향한 경건한 묵념이다.


체호프는 피르스를 통해 변화가 단지 희망만을 약속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의 침묵과 고독은 섣부른 낙관 뒤에 드리운 허망함과 상실의 깊이를 드러내며, 『벚꽃동산』이 품고 있는 비극적 아름다움을 정점으로 끌어올린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